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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꽃 Sep 19. 2023

아이의 명절증후군

아이는 어리니까 어른들의 세계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엄마 올해 추석이 언젠지 알아?"

"아니, 정확한 날짜는 모르겠어. 아직 몇 달 남았잖아. 왜?"

"추석 때 엄마생일인데 엄마랑 같이 보낼 수도 없어. 난 추석이 정말 싫어."

"왜? 추석엔 맛있는 것도 먹고 용돈도 받는 날인걸."

"나만 할머니네 가야 하잖아. 진짜 불편해."

"에이. 엄마는 이제 안 가도 OO한테는 할머니고 가족이잖아.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아이의 말에 가슴이 깊은 바닥으로 내려앉는 기분이었지만, 아이 앞에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아이를 다독였다. 하지만 나도 모르는 올해의 추석 날짜를 아이가 벌써 알고 있다고?


나는 놀란 마음에 아이의 책상에 놓아둔 탁상 캘린더를 펼쳐보았다. 정말 내 생일이 추석인지 확인을 하고 싶었다. 추석 날짜를 확인하며 너무 깜짝 놀라 다리에 힘이 풀렸다. 아이의 귀여운 탁상 달력엔, 추석 연휴 모든 날짜에  X표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아이 글씨로 함께 쓰여 있었다. 엄마 생일 하트.


엄마 생일에 용돈을 모아 선물을 사준다며 기다리면서도, 추석이 너무나도 싫은 아이. 나보다도 먼저 명절 날짜를 확인하며 명절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아이. 이제 시댁에 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는 더 이상 그곳에 가서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며 명절에 대한 염려를 내려놓았지만. 아이는 여전히 그곳에 가야 하고 그것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의 짐을 아이에게 지운 것만 같아 미안했다.


"추석 때 뭐가 제일 싫어?"

"할머니네서 자고 오는 것."

"왜? 잠자는 건 집에서 자는 거나 할머니네서 자는 거나 비슷하잖아. 그리고 아빠도 옆에 있고."


아이는 평소 잘 울지 않는 성격이다. 그런 아이가 갑자기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대성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아니. 설에 갔을 때도 새벽에 잠이 깼어. 그런데 아빠는 코를 드렁드렁 골면서 잠만 자고, 내가 말 걸어도 일어나지도 않아. 엄마도 알잖아. 거기 할머니네 우리가 자는 방. 거긴 시계도 없어. 몇 신지도 모르겠고, 잠은 다시 잘 수도 없고. 거실로 나가자니 할머니할아버지 주무시고. 그런데 외할머니네 같으면 내가 외할머니외할아버지 깨우겠지. 편하니까. OO은 누굴 깨울 수도 없고, 나는 휴대폰도 없고, 엄마한테 연락할 수도 없고. 해가 뜰 때까지 아빠가 코 고는 소리 들으며 누워있었어."


나는 아이의 눈물을 닦고 아이를 꼭 안아주었다. 아이의 작디작은 등을 쓰다듬으며,

"그런데 왜 엄마한테 얘기 안 했어? 엄마는 설에 그렇게 힘들었는지 지금까지 몰랐어."

"그거야 엄마가 힘든 게 싫어서 그랬지. 내가 힘들다고 하면, 엄마가 같이 할머니네 간다고 할까 봐."


내 두 눈에 눈물이 차고 넘쳐 눈물이 삼켜지지 않았다. 이 조그맣고 가녀린 아이가, 엄마를 걱정하며 혼자 참았을 마음을 생각하면 정말 애끓는 감정이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우리의 결혼 생활의 불화와 이혼이 이런 식으로 아이를 괴롭히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리고 아이가 표현하지 않아 무심하게 아이 혼자 시댁을 보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앞으로도 명절에 아이를 시댁에 보내야 할 테고 아이는 어떻게 명절에 익숙해질 수 있을까. 나도 익숙해지지 않던 그 명절이, 어린아이에게 상처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남편에게 아이를 시댁에 데려가지 말자고 하면, 내 부탁을 들어줄지 걱정이 앞섰다. 남편은 아이가 어렸을 때도 아이보단 어른께 할 도리를 강조했다. 아이가 80일 남짓 되었을 때, 아이를 어머님 생신 식사에 데려가는 문제로 몇 날 며칠을 다퉜었다. 아이의 건강을 염려했던 나는 장시간의 차량 이동이 걱정이 되었고, 굳이 신생아를 몇 시간 차를 태워 시댁에 꼭 데려가야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남편은 아무리 아이여도, 할 도리는 해야 한다 주의였다. 신생아가 해야 할 도리란 게 대체 있는 걸까.


그렇게 남편과 나는 입장차가 늘 있어왔고, 아이도 잘 알고 있었다.

"엄마, 아빠한테 얘기하지 마. 어차피 아빠는 안 된다고 할걸. 엄마한테 화만 낼 거야."

"괜찮아. 그래도 엄마가 어른이니까 엄마가 해결할게. 걱정 마."


아이와 나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올 추석엔 아이 없이 시댁에 가겠다고 흔쾌히 이야기해 주었다. 남편도 부모의 이혼을 적응 중인 아이가 명절 스트레스로 많이 힘들어하는 사실이 안타깝다고 말했다. 남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게 적절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고마워. 배려해 줘서."


아이는 어리니까 어른들의 세계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어른인 나는 아는 불편함을, 아이는 어리니까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들과 다를 바 없이 생각할 줄 알고, 느낄 줄 알고, 참을 줄 안다. 결코 어른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그들의 세상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자꾸만 어른의 시각에서 아이들은 아직 이만큼 사고하고,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앞으로는 아이와 더 많이 눈을 맞추고,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아이가 느끼는 감정들과 생각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줘야겠다고.

비록 남들과 똑같은 가정의 모습을 줄 순 없어도, 엄마가 든든히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줘야겠다고. 아이가 동등한 인격체로 존중받을 수 있도록 잊지 않고 노력해야겠다고.

내 마음과 눈에 담아 편지를 묻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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