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상처 줄 권리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혼을 하고 한동안은 오히려 마음이 편안했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 표현일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감정이었다. 더 이상 남편과 다투지 않아도 되고, 시댁에 가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니까 마음이 되려 편안했다. 하지만 통장 잔고를 볼 때면, 경제적으로 어떤 준비도 없이 덜컥 이혼을 결정한 나 자신이 철없이 느껴지기도 했다. 나 혼자라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아갈 텐데, 내가 아이까지 고생시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미안한 마음이 복받쳐 눈물을 삼키곤 했다.
하지만 내가 약해질 때마다 아이는 엄마와 둘이 지내는 지금이 좋다고 했다.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어도, 아이는 싱긋 웃으며 내게 힘을 주었다.
“엄마랑 나랑 와플 먹고 데이트하니까 너무 좋다. 우리 다음엔 파스타피자 먹으러 가자.”
오히려 아이가 없었다면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가 되는 게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가 옆에서 손 잡아주고 응원해 주니까, 왠지 홀로서기에 당당히 성공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아이는 내가 준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을 내게 주는 존재다. 가끔은 아이가 우주만큼 크게 느껴지곤 한다.
“이번 설에 어떻게 할 거야? 너 OO 안 갈 거야?”
남편은 아버님께서 편찮으셔서 시부모님께 나와의 이혼 얘기를 차마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리곤 내게, 설에 시댁에 가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남편의 난처한 입장을 생각해서 가야 하나 순간 흔들렸지만,
내가 이혼까지 한 마당에 시댁에 가서 또 어머님의 가시 돋친 말을 들으며 상처를 끌어안고 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이기적이더라도 이제 더는 상처받기 싫다는 마음이 컸기에 ,
"아니. 이혼했는데 내가 시댁에 갈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이혼 얘기를 하던 안 하던 그 뒷감당은 오빠 몫이야. 나한테 이런 얘기하지 마."
"아무리 싫어도 8년간 알아온 시아버지가 아픈데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단번에 거절하냐. 너 진짜 이기적이고 못됐다. 죽어도 상종하기 싫다는 거 아니야.”
그 말들이 참 많이 아팠지만, 도무지 시댁에 갈 용기가 나지 않았고, 이혼한 마당에 내가 아파가면서 배려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냉정하게 거절을 하고, 남편과는 한동안 연락조차 하지 않고 지냈다.
아버님께서 편찮으신 건 나도 안타깝고 마음이 쓰였다. 하지만 그런 감정과는 별개로, 시댁에 가는 게 너무나도 두려웠다. 나는 결혼기간 동안 시댁에 갈 때면, 늘 시댁에 가기 며칠 전부터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잠도 오질 않았다. 또 무슨 일로 혼날까, 무슨 말씀으로 내게 상처를 주실까 지레 겁을 먹었다. 그리고 시댁을 가는 날이면 옷을 홀딱 벗고 벌거벗은 몸으로 시댁에 가는 느낌이었다. 나를 보호해 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무방비 상태의 몸으로 가서, 온갖 수치심과 모멸감을 느끼는 감정이랄까.
부족한 며느리지만 나도 어머님과 같은 인격체이고,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함부로 말하고 비난할 권리를 가질 수 없음에도, 어머님은 힘들게 아들을 키워주셨기에 내게 함부로 해도 될 권리를 가지신 줄 아셨다. 늘 필터링 없이 말씀하시고, 다른 며느리들과 비교는 대화의 기본값이셨다. 나는 이런 대화법이 폭력적인 방법인 줄은 몰랐고, 내가 그저 참으면 해결되는 줄 알고 버텼다. 하지만 내 마음은 깊은 병이 들어 '공황'이 찾아왔고, 더 이상 나에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내게 상처 줄 권리는 없으니까, 내게 상처 줄 권리를 허락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관계는 일방적으로 포기하고 희생할 수 없음을, 이제야 알았다. 더 이상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을 위해 웃으며 참지 않겠다고, 내 마음이 불편하고 아프다고 신호를 보내면 그 마음을 스스로 돌봐주겠다고.
공황이 찾아오고 나서야 뒤늦게 돌아보게 된 내 마음에게.
"이제 더는 너에게 참으라고 강요하지 않을게. 우리 하나씩 되찾아가 보자. 잃어버린 웃음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