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웠던 결혼의 마침표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뭐예요?"
"여름이요!!!"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여름을 사랑했다. 그런 내게 여름은, 결혼의 시작과 끝을 안겨줬다. 그럼에도 이 여름을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작년 여름이 시작되던 그 순간이 아직도 어제일처럼 또렷하게 남아버렸다. 아이를 재우고 난 뒤 은은한 조명아래 초여름밤의 공기를 만끽하려는 찰나, 남편이 방문을 두드렸다.
"우리 이혼하자. 너랑 이렇게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남편의 갑작스러운 이혼요구에 많이 놀랐지만, 겉으론 애써 담담한 척했다. 빠르게 뛰는 내 심장과는 다르게 내 입에선 차갑고 차분한 목소리가 나왔다.
"응 그러자. 오빠가 서류 준비해줘."
담담하게 방문을 닫고 창 밖을 내다보았다.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들을 바라보며, 이 순간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정말 현실인 걸까. 처음엔 이혼에 대해 현실감이 없었다. 10년이 채 안 되는 결혼생활을 유지하며,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아등바등 버텨왔는데, 정말 이렇게 끝인 건지 실감이 나지를 않았다. 하지만 이혼할 수 없다고 남편에게 매달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자존심이 센 사람인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꽤 문제가 많았던 부부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것은 그럴싸했지만, 남편과 나는 서로에게 많이 지쳐 이미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겼다는 것을 서로가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간극을 좁힐 수 없을 정도로 멀어져 버린 건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직시하기보다는, 문제가 더 드러나지 않게 덮기에 급급했던 것 같다. 나는 거의 결혼과 동시에 허니문베이비가 생겼고, 임신 초기엔 극심한 입덧으로 집 문밖을 나가는 것조차 힘들어 의도치 않게 우리에겐 달달한 신혼 기간도 없었다. 그리고 결혼 때부터 시작되었던 고부갈등은 임신기간에도 여전했고 출산을 한 달여 남겨놓고서도 나를 괴롭혔다. 그리고 불편한 관계는 아이를 출산 후에도 이어졌다.
처음엔 엄마와 아내 사이에서,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지켜보는 남편의 입장을 이해해 내심 서운한 마음을 감출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상처 주는 말들을 혼자 오롯이 견디다 보니 억울한 마음이 들었고, 어머님의 비교와 평가가 난무하는 말씀을 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남편과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서 기꺼이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않는 남편에게 서운한 마음이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가족으로 서로 정이 담뿍 들기도 전에, 어긋나 버렸다. 나와 남편은 서로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불편해졌고, 남편은 친구나 회사 동료들과 술자리를 갖는 것에서 돌파구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대로 여행과 취미생활에서 답답한 결혼생활의 돌파구를 찾으려 했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는 같이 있으면서도 멀어져 가는 느낌이었고, 하나의 가족이라는 연대감을 갖기 어려웠다.
하나의 가족이라는 연대감과 정을 쌓기도 전에, 서로 할퀴고 상처를 준 기억들만 켜켜이 쌓여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가 서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었을까. 나도 남편도 상대방의 장점은 바라보지 못한 채, 단점을 바라보게 되고 비난하고 다투는 과정만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 남편을 내 아이의 아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바라보게 되었고, 자연스레 내가 왜 이 남자를 사랑하고 결혼을 결심했었는지 그 초심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내게는 아주 오래된 설화처럼 우리의 첫 만남과 연애시절은 사라져 갔다.
초심을 까맣게 잊어버린 나는, 초심 대신 내가 한 선택에 대한 후회만 움켜쥐게 되었다. 내가 그때 결혼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면,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마음앓이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고.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당시 나는 남편을 정말 사랑했고, 평생을 함께 하고 싶었다. 내가 바랐던 이상형의 장점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우리가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삶은 내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탓인 걸까.
그렇게 우리의 이혼수속은 물 흐르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이혼이 마무리되었다.
'아, 결혼이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는 거였다니...'
서류까지 전부 정리되어 더 이상 남편이 존재하지 않는, 나와 아이의 이름만 존재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바라보며, 김 빠진 콜라처럼 허무한 느낌이 들었다. 그간 이 결혼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버티고, 울기도 참 많이 울었는데 종지부를 찍는 건 이렇게 간단하구나 라는 생각에, 어쩐지 조금은 서글펐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남편과 다투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미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속 나를 짓누르던 돌이 사라져 버린 것처럼, 후련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상처를 주고받는 것은 생각보다 처절하고 참 많이 아프더라. 더는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상처를 주기도, 상처를 받기도 싫었다.
이제라도 온전하게 '나'로 살아가자고 다짐했던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