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곽현 Jul 21. 2024

반짝이는 금성에서 춤을 (3)

반짝이는 금성에서 춤을 (2)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쿠바 행성은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다. 어딜 가도 줄을 서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게 말이 되나 할 정도로 기다린다. 타지인에겐 낯선 이 기다림이(특히 한국 사람에겐 더욱이) 이들의 삶의 전반에 깔려있다.

 

울띠모(Ultimo)? 


줄이 있는 곳에 가면 어련히 들리는 이 말은 '마지막이야?' (네가 줄의 마지막이니?)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긴 줄의 끝이 어딘지 파악하려고 묻는 것인데 울띠모가 확인되면 그 자리를 떠나 여유롭게 볼일을 보고 자신의 일을 하다가 온다. 어차피 한참 걸리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자신 앞에 얼굴만 기억하면 땡볕 아래에서 인상을 쓰며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를 고집하며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거다. 신뢰로 버는 시간이다. 


처음에 사순이는 울띠모를 몰라 한 자리를 고집하고 서 있었다. 태양을 피할 때도 없는 그 길에 오만 인상을 쓰며 그렇게 서 있지는 않고.. 주저앉아 기다렸다. 시간을 얻으려고 선 줄인데 '1시간 데이터 이용권'을 위해 더 많은 시간(기본 2-3시간)을 썼다. 그다음은 '울띠모의 신뢰'로 어딜 다녀올 수 있었다. 그래도 거기 매여있어야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다. 얼마나 기다리면 줄이 빠지는지 감이 안 오니 그 근처를 배회하며 기다린다. 반경이 넓게 다닐 수 있다는 점, 나무 밑이나 어디 그늘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 길거리에서, 호텔 혹은 카사에서, 2~5달러만 더 주면 시간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이 기다린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런 선택지가 있었다. 시간이 돈이다.는 흔한 말이 피부로 와닿자 사순이는 일분일초가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는 숨처럼 느껴졌다.   



정전이 된 날 밤이었다. 사순이는 공연장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을 보았다. 관광객들만 웅성이는 그 깜깜함은 그들에게 사실 아주 익숙한 것이다. 보름쯤 지나니 이곳에선 정전이 아주 잦은 일이란 걸 사순이도 알았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춤을 추는 공연자도, 무대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모두 멈췄다. 모든 게 멈춰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림이 아주 익숙한 것이니까. 순응을 넘어선 체념일까. 그 순간에도 일어나 춤을 추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웃는 그들은 말한다.



어차피 불은 켜질 거야.



사순이는 이 행성에서 비교가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에 무언가 막힌 듯 답답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과 목 사이 어드매즘에서 활활 타는 열기다. 그게 어떤 때는 코에서 뿜어나오는, 의식하지 않는 숨에도 있다. 죽음에서 부활했지만 다시 같은 트랙을 돌아야 하는 그 친구처럼, 반복되는 이야기, 그건 사순이가 반복하는 어떤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초적 생명력이 더 큰 가능성으로 드러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어. 



사순이는 데낄라를 입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사순이가 당장 헤밍웨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말할 때는 회의적이었다. 아니면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꿈처럼 말했다.



네가 나를 한국에 데려가줘.

 


장난처럼 반복하는 그 말을 보며 그가 쓰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구조를 훤히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리워졌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의 눈을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가능성의 아름다움, 그 기억이 부르는 곳으로 다시 떠난다. 

망각해야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곳.

빤짝이는 하나하나의 별을 기억하며




별을 떠나며 사순이는 문득 또 생각한다. 

공간을 돌아다니는 나는 내 의식 안을 결코 떠난 적이 없어. 






/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바라보던 그 세계는 아주 진했다. 죽기 전에 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이 될 만큼. 모든 감정과 의식이 판단 없이 뛰어노는 공간에서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다.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펼치기. 끝. 금성 미션 클리어.

이전 11화 반짝이는 금성에서 춤을 (2)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