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금성에서 춤을 (2)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쿠바 행성은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다. 어딜 가도 줄을 서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게 말이 되나 할 정도로 기다린다. 타지인에겐 낯선 이 기다림이(특히 한국 사람에겐 더욱이) 이들의 삶의 전반에 깔려있다.
울띠모(Ultimo)?
줄이 있는 곳에 가면 어련히 들리는 이 말은 '마지막이야?' (네가 줄의 마지막이니?)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긴 줄의 끝이 어딘지 파악하려고 묻는 것인데 울띠모가 확인되면 그 자리를 떠나 여유롭게 볼일을 보고 자신의 일을 하다가 온다. 어차피 한참 걸리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자신 앞에 얼굴만 기억하면 땡볕 아래에서 인상을 쓰며 몇 시간이고 같은 자리를 고집하며 서 있을 필요가 없는 거다. 신뢰로 버는 시간이다.
처음에 사순이는 울띠모를 몰라 한 자리를 고집하고 서 있었다. 태양을 피할 때도 없는 그 길에 오만 인상을 쓰며 그렇게 서 있지는 않고.. 주저앉아 기다렸다. 시간을 얻으려고 선 줄인데 '1시간 데이터 이용권'을 위해 더 많은 시간(기본 2-3시간)을 썼다. 그다음은 '울띠모의 신뢰'로 어딜 다녀올 수 있었다. 그래도 거기 매여있어야 하는 건 피차 마찬가지다. 얼마나 기다리면 줄이 빠지는지 감이 안 오니 그 근처를 배회하며 기다린다. 반경이 넓게 다닐 수 있다는 점, 나무 밑이나 어디 그늘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이 좋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여기서도 돈으로 시간을 살 수 있다는 것. 길거리에서, 호텔 혹은 카사에서, 2~5달러만 더 주면 시간을 살 수 있었다. 그들이 기다린 시간을 사는 것이다. 그런 선택지가 있었다. 시간이 돈이다.는 흔한 말이 피부로 와닿자 사순이는 일분일초가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는 숨처럼 느껴졌다.
정전이 된 날 밤이었다. 사순이는 공연장 위로 쏟아질 듯 빛나는 별을 보았다. 관광객들만 웅성이는 그 깜깜함은 그들에게 사실 아주 익숙한 것이다. 보름쯤 지나니 이곳에선 정전이 아주 잦은 일이란 걸 사순이도 알았다.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도, 춤을 추는 공연자도, 무대 아래에서 움직이는 사람들도 모두 멈췄다. 모든 게 멈춰도 그들은 동요하지 않고 기다린다. 기다림이 아주 익숙한 것이니까. 순응을 넘어선 체념일까. 그 순간에도 일어나 춤을 추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웃는 그들은 말한다.
어차피 불은 켜질 거야.
사순이는 이 행성에서 비교가 없는 절대적 아름다움을 발견했지만 한편으로는 가슴에 무언가 막힌 듯 답답하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슴과 목 사이 어드매즘에서 활활 타는 열기다. 그게 어떤 때는 코에서 뿜어나오는, 의식하지 않는 숨에도 있다. 죽음에서 부활했지만 다시 같은 트랙을 돌아야 하는 그 친구처럼, 반복되는 이야기, 그건 사순이가 반복하는 어떤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초적 생명력이 더 큰 가능성으로 드러날 수 있는 곳에 가고 싶어.
사순이는 데낄라를 입에 털어 넣으며 중얼거렸다. 사순이가 당장 헤밍웨이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말도 안 되는 가능성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상상할 수 있는 그들이지만 정작 자신의 꿈을 말할 때는 회의적이었다. 아니면 그것이 누군가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꿈처럼 말했다.
네가 나를 한국에 데려가줘.
장난처럼 반복하는 그 말을 보며 그가 쓰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신이 만든 이야기의 구조를 훤히 보고 있는 어떤 사람이 그리워졌다.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쓸 수 있다고 말하는 미래의 눈을 담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가능성의 아름다움, 그 기억이 부르는 곳으로 다시 떠난다.
망각해야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를 만드는 곳.
빤짝이는 하나하나의 별을 기억하며.
별을 떠나며 사순이는 문득 또 생각한다.
공간을 돌아다니는 나는 내 의식 안을 결코 떠난 적이 없어.
내일이 오지 않을 것처럼 바라보던 그 세계는 아주 진했다. 죽기 전에 다시 떠오르는 기억의 조각이 될 만큼. 모든 감정과 의식이 판단 없이 뛰어노는 공간에서 나는 살아있다고 느꼈다. 정말 그런 것도 같았다.
펼치기. 끝. 금성 미션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