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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곽현 Jul 24. 2024

수성에서 날개 펴기(1)


점 펼치기 편 >5<



+ 천문, 점성학을 이용해 봅니다. 저의 행성과 별자리를 토대로 캐릭터와 옷을 만들어 입히고 무대에 세웁니다. 행성이 하는 그날의 질문이 있습니다. 그 답을 이어 나가다 보면 종착지에 다다르는데요. 거기에 무엇이 있을까요?




나의 북극성을 향해 가는 길, 금성 다음으로 들러볼 행성은 수성(Mercury)이다. 수성은 태양계에서 가장 작은 행성이지만 그에 비해 밀도는 아주 높고 엄청나게 날쌔게 태양을 돌고 있다. 공전주기는 88일로 행성 중 가장 짧고 속도는 무려 초속 48km라고 하니 발에 날개 단 그리스의 신 '헤르메스(Hermes)'를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수성의 영어이름은 로마신화의 메르쿠리우스(Mercurius)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그리스 신화의 헤르메스와 동일시되며 '신들의 전령' 역할을 한다. 예전 사람들은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수성에 지상과 지하 세계를 자유롭고 빠르게 왔다 갔다 하며 신의 뜻을 전하는 메신저를 투사했다. (-수성은 밝은데도 태양과 워낙 가까이 있어서 관측이 어렵다. 그래도 기어이 보겠다면 해뜨기 직전과 해가 진 직후를 잘 노려야 한다.-)


헤르메스의 어원인 헤르마 Herma는 '경계석'이라는 뜻인데 한 마을이 시작되는 지점에 세워둔 돌이라고 한다. 또 여행자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도로의 교차점에 세워진 돌무더기를 가리키기도 하는데 이런 맥락에서 헤르메스는 길과 여행의 수호신으로 여겨졌다. 경계를 아무렇지 않게 휙휙 넘나드는 헤르메스의 모습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편견 없는 그의 걸음이 넓게 퍼지며 가치가 되는 지점을 상상하게 한다.

점성학에서 수성은 정보를 다루고 타인과 소통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태양과 가까이 있어서 엄청 불타오르기만 할 것 같은 그곳이 火성이 아니라 水성이 된 것도 물이 가진 유동성, 흐르고 스미는 속성과 매치가 된다.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어디든 날아오를 것 같은 헤르메스가 묻는다. 당신이 세상에 제대로 전달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

 

이 행성의 특이점은 무엇을 주든 그것을 그대로 돌려받게 되는 곳이란다. 시간이 좀 걸릴 수도 있고 다른 데서 돌려받을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한다. 수성 표면을 따라가다 보니 화산 분화구 근처에 이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아무런 기대 없이 기쁘게 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은 이미 풍요로운 사람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미 존재하는 '풍요로움'에 관한 것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하늘을 올려다보니 수성 사수자리에 있었다.





캐릭터(수성)+옷(사수자리): 금성에 이어 또 사순이다.

+무대: 하와이 빅아일랜드

(빅 아일랜드에 가기 위해 오아후 섬에 들렀다 간다)




수성이 그날의 무대에 던지는 질문.



0. 당신이 세상에 가장 귀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것(가치)은 무엇인가?

(당신의 삶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0. 경계를 너머 타인과 나누고 싶은 것, 그것은 무엇인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받고 싶은 것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당신은 그것을 먼저 줄 수 있는가? 단,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어야 한다)





사순이는 이 질문을 염두하며 수성 탐사를 떠나기로 한다.




<Island 1 - 오아후 O‘ahu>


한 차례 또 열이 났다. 굉장히 성질이 다른 행성으로 이동할 때마다 한 번씩 아픈 건 이제 익숙하다. 그러려니 하지만 이곳 행성에선 지인이 마중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 신경이 쓰인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데 시름시름 앓는 모습으로 만나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사순이는 애써 눈을 부릅떠 본다. 공항 화장실에 들어가서 급히 뭐라도 찍어 발라본다. 그런데 이곳 도착장은 덥다. 에어컨은커녕 어디 선풍기라도 돌아가는 데가 없나 두리번거리게 할 만큼 후텁지근하다. 사방으로 뚫린 자연친화적 공항에 땀이 반가워 줄줄 흐른다. It will get brighter라고 쓰인 광고인지 뭔지 그걸 배경으로 넋을 놓고 앉아 있으니 그녀에게 전화가 온다. 경쾌한 목소리, 정신이 버쩍 든다.  



그녀는 몸에 예쁘게 딱 붙는 원피스를 입고 멋진 차를 끌고 나왔다. 에어컨 바람이 불고 말 속도가 빨라진다. 너무 오랜만이라 옛 얼굴마저 가물하다. 사순이의 기억에 그녀는 아주 천진하게 웃고 있거나 다부지게 먹고 있거나 뛰어다니거나 그런 장면밖에 없는데 언제 그렇게 학위를 따고 이곳에 임용까지 되었는지, 이렇게 멋지게 자리를 잡은 것인지 신기하다. 사순이는 그녀의 엄마라도 된 듯 대견한 눈빛을 마구 쏘아댔다. 반대로 그녀의 기억 속 사순이는 이렇게 막 사는? 캐릭터가 될지 몰랐다고 했다. 우리는 무얼 기억하는 걸까. 현재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조각들이 이리저리 펴진다. 있었는지도 모를 기억들이 진해졌다 사라진다.



그녀가 일하는 곳으로 갔다. 캠퍼스에는 꽃비가 내린다. 기와집을 배경으로 서 있으니 여기가 어딘지 더 헷갈린다. 한국학 서적을 분류하고 있는 그녀의 책상 위에는 북한 서적들이 놓여있다. 통트는 압록강이라는 장편소설에 쓰인 붉은 글씨체가 비장한듯 보이기도 하고 어찌보니 동글새침 귀여워 보인다. 이곳 대학이 여러 행성들 중 북한 도서의 보유량이 제일 많을 거라고 했다. 그녀가 프로페셔널하게 분류작업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며 사순이는 학교 식당에서 급히 사 온 음식들을 너저분하게 먹었다. 여러 언어가 막 짬뽕이 되어 있어도 보면 저절로 이해가 될 수 있는 뇌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녀는 사순이의 책도 신청해 놓았으니 곧 올 거라고 했다. (절판 전이었다) 사순이는 수줍게 웃었지만 무척 기뻤다. 그리고 상상했다. 그 책이 그녀가 신청한 그 책이 아니라 '그다음 것'이면 좋겠다고.

저기 말이야. 내가 고양이가 되어 쓴 책이 하나 있는데... 그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 진짜 좋을 건데.. 사순이는 밖으로 말하지는 못하고 또 중얼거렸다. 그녀는 무라카미 하루키 만난 이야기를 신나게 들려줬다. 갑자기 그 이야기에 사순이도 신이 났다. 그녀는 사인도 받고 질문도 했다고 했는데 뭘 물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이곳 나무들은 진짜 거대하다. 세상이 주는 모든 풍요로움을 다 받아서 체현한 존재들 같아.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나무 구경을 그렇게 했는데도 잠이 오질 않았다. 열이 나고 피곤한데 누우면 정신은 더욱 말짱해졌다. 방문자 숙소를 한 열 바퀴즈음 돌아도 잠이 오지 않았다. 별이라도 세야 하나. 사순이는 밤의 유령처럼 캠퍼스를 어슬렁거린다. 그러다 도서관 앞에서 달팽이를 보았다. 몇 바퀴 돌고 다시 와도 녀석은 거기 있다. 제자리인 것 같지만 앞으로 가고 있다.



사순이: 안녕 달팽아, 너는 왜 여기에 있어?


달팽이: 왜 여기 있냐고?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걸 보는 거야.


사순이: 아니, 나는 네가 왜 여기 있냐고 물었어.


달팽이: 아니 너는 오밤중에 왜 내 움직임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야?




2023. 봄의 어느 날




다음 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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