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 사라져도 보이는 향 (2)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무대- 터키 코냐>
아주 추운 겨울이 왔어. 타이탄 위성을 지나며 바닷속을 유영하는 꿈을 꾼 것인지도 모르겠어. 여기엔 모든 것이 온통 얼어 있거든. 우주여행의 막바지에 다다르면서 현은 어렴풋이 자신이 쓰는 시나리오가 뭔지 알 것 같은 기분이야. 등장인물은 계속 바뀌지만 반복되는 그 이야기의 구조가 보이기 시작한 거야. 코냐, 이번엔 그게 압축돼서 단 하루 만에 상영되었어. 진한 뿌리 향을 담은 믿음의 씨앗, 그게 화면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는지 아주 싹 다 훑고 가고 싶은데 마음이 조금 급했던 모양이야. 그의 의중을 그대로 반영은 해야겠고 시간은 얼마 안 남았고. 그 믿음을 실타래처럼 풀고 푼 지난 7년의 시간을 원데이 영화로 만들어야 했던 연출가의 고뇌가 느껴진다랄까. 토성은 심지어 하루도 짧아.
나는 혼자야. 날 좀 도와줘. 나는 내가 누군지 모르겠어.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다고.라고 중얼거리며 현을 따라다니는 시리아 소녀의 등장부터 시작이야. 그렇게 시작된 코냐 이야기는 어딘지 비슷한 패턴이 있었어. 그 소녀, 어찌나 수시로 나타나는지 볼 때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흠칫했어. 온몸을 가리는 검은 차도르, 얼음장 위를 맨발로 걷는 느낌 같아. 한국말을 할 줄 아는 치과의사가 그야말로 난데없이 등장했고 치과에서 현은 발 치료를 받았어. 카펫을 파는 사람들에게 그 옛날 로마 사람과 오스만 사람들이 사이좋게 살았던 시절의 이야기를 들었어. 수백 년 동안 기독교와 이슬람 신자들이 공존하며 살았다고 하더라고. 그들은 실레(Sille)라는 코냐 근처 지역에 동굴을 현에게 보여주었어. 그 안에 들어가니 원시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야.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벽에 그림을 그리다가 밤이 오면 짐승의 대화를 나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어. 동굴에서 구름이 피어나는 모습이 신기해. 우리는 구름이 무슨 모양처럼 보이는지 서로 이야기하며 아이처럼 까르르 웃었어. 이스탄불에서 산 옥스포드 출판사의 코란과 엄마가 주신 포켓용 신약성서를 가방에서 꺼내 기념으로 그들에게 주었어. 그들은 신약성서에 쓰인 한국말이 동글동글 예쁜 그림 같다며 또 웃었어.
둥근 돔 아래에서 회전춤을 보면서 초록색 표지에 붉은 태양무늬가 박힌 루미의 시를 읽었어. 그곳에서 시리아 소녀를 다시 보았고 영어로 소설을 쓰고 있는 이란 남자를 만났어. 그는 이란 정부의 색과 전혀 다른 자유에 대해 현에게 말했고 터키 여자와 살았던 경험을 들려주었어. 그게 어떤 이야기가 될지 상상하며 현은 언젠가 사진에서 본 이란의 일상의 거리 풍경을 떠올렸어. 거의 모든 색이 다 있던 그 아름다운 거리, 꼭 한번 걸어보고 싶었거든.
현은 아무 연고가 없는 코냐 행성에서 말도 안 되게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막 펼쳐지는 걸 보았어. 무의식에 있던 모든 것들이 현실에 나와서 널을 뛰며 자. 보아라. 이게 네가 쓰고 있는 이야기다. 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어딜 가도 그랬던 것 같아. 행성이 달라져도 별을 잇는 손가락은 익숙한 패턴을 그렸으니까.
호텔로 돌아온 후 다시 나간 길, 골목마다 새로운 사람이 나타났어. 이번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지고 닫히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하루가 벌써 저물고 있어. 발을 디디고 있는 이곳 천체의 자전을 새삼스럽게 느끼기라도 하는 듯 속이 울렁거렸다고. 이야기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있는 인물들은 '자 이걸 어서 풀고 지나가렴' 하는 것처럼 빠르게 다가오고 빠르게 스쳐갔어. 하나의 퀘스트를 수행하면 다른 퀘스트가 오는 식인데 그건 현의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한 퍼즐 같았어. 이제 익숙하니 이 정도는 빨리 지나가도 괜찮겠지. 하는 것처럼 그 접촉의 이야기는 무한한 확장성을 즐기던 이전과 다르게 닫히기 위해 현에게 돌진했어.
프랑스 문학을 전공하고 가르친다는 남자, 악기를 만들고 노래하는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를 오시라고 초대한 커뮤니티 센터에 예술가, 옆 건물에 큰 불이 나서 등장한 소방관과 경찰, 다시 현을 보러 온 치과 의사, 그들이 가진 이야기가 현을 지나며 모든 문이 소리 없이 닫혔어.
하루 안에 일어난 일이야. 등장인물만 떠올려도 숨이 가빠. 엄청 바쁘게 아주 미친 듯 돌아가. 발이 땅에 닿은지도 모르게 그렇게.
내가 쓰는 시나리오에 등장하는 인물, 그들이 쓰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
내가 느끼고 싶은 것들이었어. 좋고 나쁘다고 이름 붙인 모든 것이 그러했어. 그걸 제대로 알게 하는 그 이야기들을 바라보며 드디어 이야기에서 나올 수 있었어. 아주 찰나야. 이야기 밖에 머무는 것.
애초에 아무것도 없던 암흑,
별들은 다시 탄생하고 그걸 잇는 그 손가락이 내게 말해.
코냐에서 모든 행성들이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았어. 검은 옷을 입고 나와 한데 뭉쳐있던 사람들이 그 옷을 벗는 순간, 그들의 날개는 천천히 펼쳐져. 마침내 활짝 다 열린 그 날개에 저마다의 원이 생겨나고 그 바람은 더 큰 원을 그리게 해.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아. 그들이 그리는 자취는 모두 각자의 중심축을 가지고 있어. 어느 누구도 예외가 없어.
동심원의 물결 같은 그 하나하나의 원 속에 하얀빛의 희열과 평온함이 떠 있어. 곧게 뻗은 팔과 몸의 중심에서 퍼져나가는 힘이 있는 움직임, 그 에너지는 다른 행성의 기쁨을 방해하는 일이 결코 없어. 펼치면 펼칠수록 서로 더 기쁘게 섞여 돌 수 있어. 자신의 중심축을 잃지 않는 그 회전은 언제나 순간을 알아.
하나하나의 꽃은 전체로 보아도 꽃이야. 전체의 꽃은 하나하나 자세히 보아도 꽃이야.
영원할 것 같은 그 순간이 끝날 때 사람들은 숨을 고르며 다시 하나가 되었어. 아주 큰 하얀빛. 아주 처음 그 시작처럼.
나는 그 순간의 향을 영원히 기억해.
펼치기. 끝. 토성 미션 클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