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름은 끊겨도 여행은 계속된다

52도 고량주의 밤

by 실버라이닝


상하이 여행의 마지막 밤이었다. 디즈니의 불꽃놀이 대신 상해에 사는 친구네와의 저녁식사를 선택했다. 다리가 너무 아파 인어공주가 된 듯 바닥을 기어 다닐 것 같았지만, 훠궈 생각에 꾹 참고 디디를 잡아탔다. 친구와 위챗으로 연락을 주고받으며 식당 앞에 도착했다. 밤거리는 강남역 같았다. 키 큰 빌딩들 사이로 연말을 즐기려는 가족들과 친구들이 삼삼오오 모여 음식점 이곳저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층별로 각종 음식점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훠궈 전문 뷔페집. 시간은 8시 반. 직원이 인사를 건네며 10시에 문을 닫기 때문에 9시 반에 라스트 오더라고 알려줬다. “괜찮아요!” 하고 대답한 후, 우리 모두 눈을 반짝였다.



"들었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앞으로 1시간 반이닷!"


어른들은 채소와 해산물을, 아이들은 고기와 소시지, 햄을 접시에 가득 담아 테이블로 가져왔다. 어른들이 음식을 육수에 넣는 동안 아이들은 '음료 무제한'이라는 말에 뽀로로 주스를 양손에 가득 들고 왔다. 나도 맥주를 좀 더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일어서려는데 친구 남편이 미소를 지으며 가방을 열었다.


“제가 상하이에서 10년 살면서 많은 고량주를 마셔본 결과, 이게 최고예요.


KakaoTalk_20250125_125322953_17.jpg


수정방. 이름도 곱지.


알고 보니 이 식당은 개인 술을 가져와도 된단다. 고량주는 병을 따기도 전에 그윽한 향이 났다. 나는 물개박수를 치며 빨리 따라 달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다. 고량주 잔이 없어 물컵에 술을 따른 것이다. 52도짜리 고량주를 물처럼 벌컥벌컥 마시다니. 하루 종일 디즈니랜드에서 쏟아부은 몸에 고량주를 쏟아부으니 슬슬 달아오를 새도 없이 금세 세포들이 펑 터져버렸다. 어느 순간 필름이 뚝 끊겼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침대 옆에 아들이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다행이다. 아들은 잘 자고 있었다. 하지만 속이 울렁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핸드폰을 보니 친구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잘 잤지? 어제 디즈니에서 고생하고 급하게 마셔서 빨리 취했나 봐. 일어나면 연락해.



불안했다. 어젯밤에 혹시 친구네 부부에게 실수를 한 건 아닐까? 지갑을 열어보니 위안화도 하나도 없었다. 대체 어젯밤 나는 무슨 짓을 한 걸까. 알고 보니 위안화는 친구네 딸 둘에게 용돈으로 주었다고 했다.


화장실에 가서 샤워를 하려는데 서 있기조차 힘들어 앉아서 물을 맞았다. 침대로 돌아오니 아들이 울먹이며 말했다.


엄마, 괜찮아? 엄마가 계속 어지럽다고 해서 나 하나도 못 잤어.


아… 미안하다, 아들. 숙취로 어지럽다고 한 게 아들 눈엔 많이 아픈 걸로 보였겠구나.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아들이 심장마비와 심근경색을 검색했다. 나 때문에 밤새 얼마나 불안했을지 생각하니 너무 미안했다.


조식을 먹으러 내려가는데, 아들이 이것저것 담아 와서 내게 건넸지만 나는 한 입도 못 먹고 커피만 마셨다. 애써 괜찮은 척 웃으며 속으로 말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숙취 해소제란다 아들.' 갑자기 우리 동네가 너무 그리웠다.


그때, 친구가 천사처럼 등장했다. 한 손에 초록색 약병을 들고.



집 근처에 한국 마트가 있는데, 거기 숙취 해소제가 있더라고!


무슨 마법 해독제를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30분쯤 지나니 속이 가라앉기 시작하고 위장이 화를 풀었다. 식은땀도 멎고, 드디어 몸이 제자리를 찾는 듯했다. 컨디션을 회복하니 마지막 날을 제대로 보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아들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가자, 예원으로


패딩 지퍼를 쭉 올리며 그렇게 상하이의 마지막 날을 불태울 준비를 했다.



KakaoTalk_20250105_185426952_29.jpg


keyword
이전 08화디즈니에서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