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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온기

상해여행의 끝자락, 예원에서

by 실버라이닝

드디어 중국 상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다. 우리는 예원으로 향했다. 예원은 400년 전 명나라 관료 반윤단이 아버지의 안락한 노후를 위해 20여 년에 걸쳐 만든 곳이라고 했다.



예원 안으로 들어오니 작고 소박한 정원이 마치 할미꽃 같다. 여기저기 중국인들이 전통 의상을 입고 촬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걷는 길마다 돌을 깊이 박아 만든 구불구불한 길이 우리를 다음 공간으로 안내했다. 길목마다 벽을 뚫어 만든 동그란 문들이 다음 차원의 세상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육각형 창문들 너머로 바닥까지 드리워진 버드나무 잎들과 흰 오리들이 동동 떠다니는 연못이 보였다. 보는 각도마다 장면이 달라지니 꼭 액자 속 그림을 감상하는 듯했다. 연말이라 사람들이 북적이지만 않았더라면 하루 종일 숨바꼭질을 하며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공간이었다. 길을 따라 이어지는 천장 덕에 비 오는 날 다시 와서 빗소리를 들으며 걷고 싶었다.




고요한 예원을 배경으로 400년의 세월을 지내온 소나무의 가지가 하늘로 뻗고 있었다. 옆으로 둥글게 공간을 만들어 주고 있는 벽들에게서 지내온 날씨와 계절, 싸움과 사랑의 흔적들이 느껴졌다. 돌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자 온기가 느껴졌다. 400년의 이야기가 모여 아궁이에서 불을 지피고 있었다. 한참을 앉아 오래된 고요함이 주는 위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예원을 나오는 길에는 들어갈 때 눈으로 점찍어둔 가게를 들러 기념품 쇼핑을 했다. 친구가 적극 추천하는 중국의 국민 로션이라는 미인 핸드크림을 20개 정도 사고, 상해에 사는 한국 엄마들은 하나씩 꼭 들고 다닌다는 가성비 좋은 에코백도 샀다. 고등학생 딸내미 줄 유가향 립밤까지 사고 나니 그제야 좀 안심이 되었다.


그런데 아들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녀석은 이상한 뱀 장난감이랑 뽁뽁이 인형 앞에서 귀여운 고양이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격이 비싸진 않았는데 내 기준으로는 너무 쓸 데가 없어 보여 선뜻 지갑이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새 아들이 파파고를 사용해서 중국인 사장과 거래를 하더니 가격을 절반으로 깎고 있었다. 그 용기와 재치가 기특해서 사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난 인형이 아니라 너의 경험을 사준 거다.



아들은 뱀 인형은 태권도장에 다니는 친한 형에게 주고 뽁뽁이는 자기가 가질 거라고 손에서 놓질 않았다. 그리고 그제야 상해 여행이 완성형이 되었다는 듯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 사실 심경이 좀 복잡했다. 상해 여행 첫날 들려온 한국 비행기 폭발 사고 때문에 마음이 무거웠다. 여행 내내 흥분되고 기분이 들뜨려고 할 때마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곤 했다. 즐거운 여행이지만 사고 소식이 계속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어서, 너무 들뜨는 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웠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그 마음 덕분에 오히려 여행을 소중하게 받아들였는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관광지를 돌아다닌다는 마음보다 상해에서 보내는 시간 자체를 더 의미 있게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 같다. 예원의 고즈넉한 풍경이 그런 복잡한 마음을 위로해 준 듯도 하다.


누군가의 일상이 파괴되는 시간이 누군가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알려주는 아이러니를 안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아들과 창밖을 바라봤다.


엄마, 우리 중국어 공부해서 또 오자.

아들이 웃으며 귀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창문 아래로 3박 4일 동안 걸었던 길과 사람들과 차들, 디즈니성과 식당 건물들의 조명이 함께 반짝이며 서서히 사라졌다. 저 안에 예원의 소나무와 벽들이 서 있겠지. 손바닥에 남아있는 온기를 느끼며 고요히 주먹을 쥐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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