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행복한 눈으로 안아줄게

허그타임

by 실버라이닝

결혼하고 그 해에 예쁜 딸을 낳았다. 남편과 둘이 계산을 해보니 역사가 이루어진 날은 크리스마스 즈음이 분명했다. 세상에 사랑과 축복이 가득한 날 생겼으니 '온누리에 축복을' 주는 아이가 되라고 태명을 '누리'라고 지었다. 입덧이 거의 없었고 몸도 크게 자라지 않은 덕분에 임신 기간 내내 모든 게 수월했다. 일하던 영어유치원에도 출산 예정일 열흘 전까지 출근했다. 지각할 것 같은 날엔 지하철 4호선 계단을 내달려 닫히는 문 사이로 슬라이딩하기도 했다. 수업 중간중간 배가 뭉치고 졸음이 몰려올 때면 교무실 한편에 있는 소파에서 쪽잠을 자기도 했지만 뱃속의 누리는 건강하게 꾸물거리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나에게 기쁨을 준 것도 잠시, 누리는 입이 짧아 잠을 깊이 못 자는 악순환의 고리에 걸려들었고, 덕분에 나는 불면의 늪에 빠져들었다. 그 와중에 영어를 까먹을까 봐 불안감과 강박에 시달리던 나는 모유수유를 하며 수유 사이사이에 파트타임 수업을 다녔다. 일에서 보람을 찾는 나 자신과 나만 찾는 딸의 엄마라는 양팔저울은 매일 균형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딸은 18개월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1년 넘게 등원할 때마다 울음바다였고 외할머니와 하원을 할 때에도 내내 엄마만 찾은 탓에 나는 매일매일 휴직을 고민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적 여건을 고려할 때 일을 계속해야 했고 엄마는 일주일에 세 번씩 신장투석을 하시면서도 매일 오셔서 내가 퇴근할 때까지 손녀딸을 돌봐주셨다. 고민 끝에 엄마는 우리가 사는 아파트 같은 동으로 이사를 왔고, 덕분에 이모였던 내 동생이 함께 내 딸을 돌봐주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후, 동생이 결혼을 하고 우리가 사는 아파트 앞 동으로 이사를 오면서 나는 육아에 있어 천군만마를 얻었다. 결혼하고 다음 해 출산을 한 동생은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로 살았고, 자연스럽게 동생의 집은 나의 퇴근길 참새방앗간이 되었다. 손녀딸을 하원하며 놀이터와 동네슈퍼마켓을 전전하던 엄마는 이제 안심하고 부빌곳이 생겼다. 함께 내 험담을 나눌 동지도. 동생이 아이를 낳고 동생집은 친정의 아지트가 되었다. 엄마와 나와 동생, 그리고 내 딸과 동생의 아들이 매일 함께 저녁을 먹고 치우고 씻다 보면 제부가 왔다. 남편까지 그곳에 모이면 자연스럽게 맥주를 꺼내 특별할 것 없는 하루를 가볍게 취해 웃으며 보내곤 했다.



하지만 2012년 7월 어느 여름 이후로, 그 집은 텅 비었다.



동생과 제부, 아들 조카 둘에 우리 식구까지 시끌벅적했더 그 집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우리 동과 마주 보는 동이었던 데다가 층수가 같아 현관문을 열면 동생집 거실이 보여 가끔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눌 정도였다. 동생이 죽고 한동안 나는 메일 아침 현관문을 열 때마다 그 집을 보기 힘들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 후 약 6개월 후에 이사를 했다. 추억이 겹치지 않는 곳으로 멀리 가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엄마가 오랫동안 신장투석을 하신 병원이 근처였기 때문에 최대한 근처를 벗어나지 않기로 했다. 길 건너 새 아파트로 이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게 살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6살이 된 딸이 자꾸만 새 집이 싫다며 옛날에 살던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딸은 한 번만 그 집에 가 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누가 살고 있는지 보고 싶다고도 하고, 그냥 그 아파트 놀이터에 다녀오고 싶다고도 했다. 나는 근처만 가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숨이 찰 때라 도저히 갈 수 없어 딸에게 나중에 한번 가자고 얼버무리곤 했다.



생각해 보면 딸은 그 아파트가 고향인 셈이었다. 그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함께 했고, 매일 엄마와 산책을 했고, 할머니와 하원을 했고, 이모가 해주는 저녁을 먹었던 동네이다. 갓 태어난 조카동생과 같이 목욕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세발자전거를 탔던 곳이다. 그랬던 곳을 갑자기 떠나야 했으니 아이는 그곳이 당연히 그리웠을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 마음을 헤아리고 달래주기 위해 살던 곳에 가기에 나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었다. 나는 딸에게 그저 '나중에'라는 말만 반복하며 미룰 뿐이었다. 아주 가끔은 그 말 좀 그만하라고 짜증을 내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동생의 죽음 이후 약 1년간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을 텐데. 그 모습을 가장 가까이에서 봤을 사람이 바로 딸이다. 우리 나이로 5살, 이제 막 유치원에 적응해 한 학기를 마친 여름에 그렇게 큰 일을 겪었다. 딸은 어려서부터 예민하기도 했지만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동생의 사망 소식을 전화로 받고 자고 있던 딸을 깨워 엄마에게 가던 그 길부터 딸은 평소답지 않게 의젓하고 조용했다. 나에게 무슨 일인지 묻지고 않고 그저 어른들의 대화와 표정으로 그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듯했다.



장례가 시작되고 장례식장 근처에 살던 남편의 친구집에 딸을 맡겼다. 지금 생각해 봐도 너무나 고마운 지인들이다. 딸은 3일 동안 낮에는 그곳에서 지내다가 밤이 되어서야 하루 종일 장례식장에 있다가 지쳐 돌아온 엄마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그리고 잠자리에서도 아무 말 없이 그저 조용히 하루종일 재미있었다는 말을 남기며 잠이 들 뿐이었다. 덕분에 나는 4명의 장례를 동시에 치르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그나마 잘 보내고 돌아올 수 있었다.



사고 6개월 후, 나는 남편에게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어린 조카 둘을 잃은 아픔을 극복하고 싶고 가라앉은 집안에 활기를 넣고 싶기도 했다. 아이를 이렇게 의도적으로 어떤 소용을 위해 낳아도 될까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나도 모르게 필사적으로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할 뿐이었다. 나를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하지만 그렇게 힘들게 가진 아이는 20주 만에 뱃속에서 내 곁을 떠났다. 마치 자신은 누군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고 나에게 경고하듯이, 보란 듯이 말이다.



나만큼 내 딸도 동생을 잃은 것에 아파했다. 나처럼 4명의 가족을 잃은 지 얼마 안 되어 또 하나의 가족을 잃은 아이였다. 그 후로 내가 겨우 몸을 추스르고 다시 6개월 만에 임신을 했을 때 가장 기뻐했던 아이도 딸이다. 딸은 또 임신한 나에게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하며 말했다.


"엄마, 힘들면 누워 있어. 내 동생 또 죽으면 안 돼. 엄마 우리 만약에 남동생을 낳으면 그동안 죽은 동생들 대신이라고 생각하고 잘 키우자."


7살 아이가 세 명의 동생을 잃고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위로였다. 그땐 그런 말을 해주는 아이가 기특하고 고마워서 내가 딸을 참 잘 키웠구나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그동안 홀로 겪었을 아픔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린다. 그때 누가 내 딸을 돌보았을까? 딸을 잃고 정신없던 외할머니, 동생을 잃고 멍해있던 엄마, 엄마와 외할머니는 챙기느라 분주했던 아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 마음을 추스르려는 노력의 10분의 1을 떼어 딸아이를 더 챙겨주고 싶다.



그때 내 딸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도 두렵고 허탈하고 무서웠을 텐데 항상 휴지를 들고 다니다가 엄마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면 1초 만에 달려와서 눈물을 닦아주던 아이.



딸이 1학년때 동생이 태어났다. 딸이 바랐던 것처럼 아들이 태어났고 오랜만에 집안에 활기가 돌았다. 하지만 딸은 조금씩 어두워졌다. 한참 관심을 받아야 할 초등학교 1학년 시기에 갓난쟁이 동생이 생기는 바람이 언제나 2순위가 되었다. 딸을 챙긴다고 챙긴다는 엄마는 신생아 육아에 절어 늘 피곤하고 짜증이 가득했다. 그나마 홀로 받던 사랑과 관심을 나눠야 하는 것에 학교 생활 적응까지 여간 힘든 게 아니었을 텐데. 그런 딸에게 나는 언제나 이해와 양보를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아이가 아침에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버티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와 동생과 같이 집에 있고 싶다고 했다. 나는 달래로 어르다가 결국 화를 내고 말았다. 소리를 지르고 우는 아이를 내쫓다시피 하고 나서 혼자 거실 소파에 앉아 펑펑 울었다. 괜히 모든 게 다 동생이 죽어서 생긴 일인 것 같았다.


그런데 10 분뒤 다시 현관문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삐삐 삐삐삐-'


"엄마... 한 번만 안아주세요..."


나는 현관문에 서서 딸을 안고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딸에게 학교에 정말 가기 싫으면 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딸은 이제 됐다고, 갈 수 있다며 눈물을 닦고 웃으며 학교에 갔다. 나는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아이에게 소리를 지른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고민 끝에 다음날부터 종이에 편지를 적어 딸아이 손에 쥐어 주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사랑스러운 우리 딸. 오늘도 파이팅!"


매일 손편지를 써서 등교길 현관문을 나서는 아이 손에 쥐어주고 꼭 끌어안았다.

아이가 숨 막힌다고 그만 놓아달라고 할 때까지 세게 꽉 안아주는 허그타임. 우리는 그 시간을 사랑했다.



어느새 중학생이 된 딸은 남들이 말하는 사춘기를 세게 겪지는 않았다. 가끔 기분의 업 다운이 심한 정도였고 그 정도면 나는 착한 사춘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학원에 가기 싫다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유가 없이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은 나의 육아 원칙에 철저히 위배되는 일이라 일단 문을 열고 대화를 하자고 했다. 그런데 딸이 난데없이 펑펑 울며 가기 싫다고 했다. 그냥, 가기 싫다는 거였다. 나는 물론 그런 날도 있을 수 있다고 달래며 그래도 학원에 타당한 이유를 전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딸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엄마는 동생만 좋아하잖아! 나는 안 사랑하잖아! 나는 너무 별로야. 얼굴도 못생기고 성격도 별로야."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정도였다.


"야! 이게 기껏 예쁘게 낳아줬더니 어디서 헛소리야! 피곤하면 그냥 잠이나 자!"


딸에게 소리를 지르고 대충 대화를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딸은 오히려 더 서럽게 울면서 내가 자기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어린아이처럼 생떼를 썼다. 나는 길고 지루한 이 대화를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몰라 되려 딸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래서 넌 엄마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데? 응?"


그때, 딸이 눈물을 닦으며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대답을 했다.


"나를! 하루에 한 번! 안아주세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세요!"


나는 딸을 꼭 끌어안으며 말했다. 고마워. 그럴게. 그런 마음이었구나. 그럴게. 그러자. 고마워. 미안해. 네 마음을 몰라줘서. 미안해.



다음 날 아침 등교하는 딸을 부르니 딸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내가 딸을 꼭 안으며 사랑한다고 말하자 딸은 '응'이라고 대답하며 휙 하고 돌아서 '다녀오겠습니다'하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 뒤로는 이틀에 한 번, 삼일에 한 번, 그러다 점점 더 뜸해졌지만 생각나면 한 번씩 허그타임을 했다.



가끔 생각한다. 설거지 하다 말고 갑자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엄마의 눈을 닦아주던 5살 아이는 그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내가 조금만 더 정신을 차리고 그 아이에게 괜찮다고, 네가 있어 다행이라고 말을 해주었더라면 아이는 조금 덜 힘들고 덜 외로울 수 있지 않았을까? 요즘 딸의 눈에 비친 엄마는 어떤 모습일까? 일을 하고 등산을 하고 가끔 훌라춤을 추는 엄마가 예전보다는 훨씬 행복해 보였으면 좋겠다. 그 행복이 딸에게도 전이되어 지난 세월 불안했던 마음을 어루만져주면 좋겠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이라고 가정하다가 그런 생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임을 알기에 다 큰 딸에게 이제라도 5살 때 못다 한 사랑을 표현한다. 다만 중학생에게 걸맞은 어휘를 쓸 뿐이다.



"우리 딸 존멋. 스타일 미쳐 따리. 넌 내가 낳을 수 있는 최고의 작품이야. 사랑해!"



올해 중3이 되고 예고 입시를 준비하며 더 바빠진 딸은 얼굴 보기가 힘들 지경이다. 이젠 딸이 오면 내가 오히려 딸을 붙잡고 허그타임을 갖는다. 어느새 나보다 키가 10센티나 커진 딸에게 키를 재보자고 하며 은근슬쩍 다가가 키를 재고 끌어안아본다. 허그타임을 유도하는 나만의 요령이다. 대놓고 안아달라고 했던 딸에 비해 참 어리숙한 방법을 시도하는 엄마이지만 딸은 내 맘을 아는지 웃으며 그 큰 덩치를 나에게 내어준다. 지금도 스터디 카페에 간 딸이 곧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딸이 오면 또 그새 더 큰 것 같다며 키를 재보자고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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