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뭘 그런 걸 가지고 예민하게 그래?”
“무슨 생각이 그렇게 많아?”
“헛, 넌 그런 것까지 기억해?”
“말이 없네.”
“눈치 좀 그만 보고 자기 주장도 좀 하고 살아.”
“빨리 좀 해 빨리. 그게 그렇게 오래 고민할 일이야?”
“우린 아무렇지도 않은데, 넌 아마 울거다. 넌 걸핏하면 슬프잖아.”
참 자주 듣는 말이었다.집에서도 회사에서도, 친구들 모임에서도. 사람들과함께 하는 모든 일에서 느껴지는 개운치 않은 불안감과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내 모습이 점점 버거워 지던 무렵, 문득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 사람들은 내게 저런 말을 그리도 쉽게 하는 것이며 왜 나는 그들의 말과 표정에담긴 비아냥과 안타까움을 보고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못하는가. 넌 대체 왜 그러냐, 그래서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려고 그러냐는 류의 빈정거림에도 그러는 너는?하며한번도 그들의 말의 당위성을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럴 법도 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과 선생님, 친척들과 동네 어른들, 그리고 성인이 돼서 만난 내 주변 사람들 모두 같은 이야기를 했으니 말이다.
그들은 모두 그럴 만 한 사람들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나와 다른 기질을 가진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그들의 사고방식과 언행은 민감성을 가진 나와 판이하게 달랐다. 여기에 민감함을 결점이라고생각하는 오래된 사회적 통념까지 더해지니 자기와 다른 기질의 민감인에게 무슨 약점이라도 있는 듯 으름장을 놓기 일쑤인 것이었다. 이렇게 불공평하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사회적 풍토가 지속되어도 좋은가? 민감함이곧 열등함이며 민감하지 않은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이런 의문조차 갖지 못한 채 살아온 우리는 앞으로도비민감인들의 말을 듣고 그저 일리 있는 말인 것처럼 받아들이기만 할 것인가?
민감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을민감인 입장에서 한번 되짚어 보자.
“그런 것도 감지 못하고 어떻게 그리 둔감해?”
“왜 이리 생각이 없어?”
“어머, 넌 어떻게 그걸 기억 못해?”
“말이 너무 많네.”
“남들 기분도 좀 생각해. 자기 입장만 내세우지 말고.”
“왜 그렇게 맨날 급해? 내가 느린 게 아니라 네가 성급한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나는 그만큼 감정이입을 잘하고 남의 심정을 잘 헤아리는 사람이야. 힘들때 위로가 되는 사람.”
지금 이 말을 듣고 맞아!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였어!라고 생각하며 속이 후련해 진다면당신은 민감한 사람이다. 민감한 당신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민감한사람들은 사실 남들에게 이런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는 걸 말이다. 민감인은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는 걸 중요하게 여기고 혹시나 내 실수로 관계가 불편해 지는 걸 견디지못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거 아는가? 민감성을 갖고 있지않은 사람들은 저런 말을 들어도 민감인들 만큼 깊고 강하게 내면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걸. 그러니 비민감인들이알게 모르게 보이는 이런 종류의 무심함에 대해서는 너무 오래 참지 말고 알려주는 것이 좋다. 그들의무심함이 민감한 사람들에겐 무례함으로 다가올 수도 있음을 알려주어야 적당한 안전거리가 생긴다.
“때로는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 길을 발견하는데 가장 긴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그들의 민감성이 양날의 검이기 때문이다. 민감함은 그들을 탁월하게해주지만 삶의 고통에 더 취약하게 만든다. 삶의 목적을 늦게 발견한다고 벌을 받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영혼은 마감시간이라는 걸 모르니 말이다.”
― 제프 브라운 ‘사랑하며 나아가기'에서
민감한 사람들은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지만 삶의 고난을더 깊이 느껴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는 말은 내게 큰 위로가 되었다. 이 말에는 민감한 사람들의뛰어난 재능을 인정해주고 남들보다 더 힘들 수 밖에 없는 민감인의 삶의 여정을 덤덤히 받아들일 수 있게 해주는 위력이 있었다. 내 탁월함과 잠재력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고 왜이리 항상 힘들기만 하냐고 세상을 원망하던 내가 민감하기에 더뛰어나고 그래서 더 힘들 수도 있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나는 민감해서 더 행복하고 누구보다 더생생하게 삶을 만끽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