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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너지힐러 소을 Jan 24. 2019

이 세상의 아픔과 고통이 모두 내 것인 듯


햇살이 내리쬐던 어느 봄날의 하교길. 친구와 함께 집으로 가는 중이었다. 산등성이에 위치한 학교라 그날도 등산하듯이 오르락내리락 걷고 있었다. 길목에 나무가 많고 길고양이와 강아지, 가끔은 개구리나 도롱뇽도 볼 수 있었다. 그날은 저만치 아래 아이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웅성거리면서 서성이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았다. 


"허억, 엄마! 어떡해! 큰일났어…………………."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결국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훌쩍거리는 아이들, 멍하니 서서 구경하는 아이들 틈에서 나는 몸까지 떨면서 울고 있었다. 


좁은 도로 한복판에 고양이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지나가는 차에 치여서 거의 죽어가고 있었는데 교통사고의 잔해가 너무나도 생생하게 도로를 물들이고 있었다. 몸의 한쪽은 살아서 꿈틀대는데 나머지 한쪽은 납작해져버린 그 모습이 정말 끔찍했다. 고양이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서서히 죽어가는 고통의 소리인지 주위를 둘러싼 인간들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었지만 앙칼진 비명 소리가 내겐 그저 애처롭게 들릴 뿐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서 뭐라도 해주고 싶었지만 다리가 후들거려 일어설 수가 없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근처 상점 주인아저씨가 나타났다.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또 한 손에는  빈 사과상자를 들고 말이다. 


"에이씨, 니네들 집에 안 가냐? 여기 이렇게 계속 서 있으면 안 돼. 가게 앞을 막고 서 있으면 어떡해!"


화가 난 아저씨는 빗자루로 고양이를 상자 안에 쓸어 담으려 했다. 고양이는 이빨을 드러내며 더 사납게 비명을 질러댔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니 심장이 터질 듯 아파왔다. 어떻게 죽어가는 동물을 저렇게 함부로 다룰 수가 있는지, 어른이 돼가지고 아이들 보는 앞에서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앙칼지게 저항하는 고양이를 아저씨는 빗자루로 밀고 또 밀었다. 그러다가 고양이가 상자에서 떨어졌다. 더 화가 난 아저씨는 마구 욕을 해대면서 거칠게 빗자루를 휘둘렀다. 결국 고양이를 상자에 담은 아저씨는 전봇대 아래 쓰레기 더미에 상자를 툭 던지고는 사라졌다. 구경이 끝난 아이들은 제 갈 길을 갔다. 나는 친구의 부축을 받으면서 집까지 울면서 간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날 나는 큰 충격과 실망, 그리고 분노와 슬픔을 느꼈다. 죽어가는 동물을 그렇게 학대한 어른에 대한 실망과 분노, 그 모습을 보고도 우는 것 말고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던 나에 대한 자책감이 밀려왔다. 그런 일을 당한 고양이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만큼 민감한 사람이라면 아마 이 이야기를 듣고 분개하고 있을 것이다. 그 아저씨의 험한 행동에 대해서, 그리고 상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을 고양이의 고통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아니, 그에 앞서 사고 현장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이미 당신은 표정이 일그러지고 잔혹함에 심장이 꿈틀거렸을 것이다. 


민감한 우리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일에 취약하다. 같은 장면을 보고 같은 일을 겪더라도 남들보다 더 많이 괴로워한다. 그것이 인간을 향한 것이든 동물과 자연을 향한 것이든, 민감한 사람들의 시선에는 민감인 특유의 박애주의가 담겨있다. 우리의 시선과 마음은 사회적 약자와 학대 받는 동물, 환경오염처럼 사랑과 존중이 필요한 곳으로 향한다. 


자신이 민감한 사람이라는 걸 모르고 살았다면, 어린 시절을 한번 떠올려 보자. 어디를 가든 소외된 친구들이나 몸이 아픈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고 마음이 쓰이진 않았는지. 강아지나 고양이를 많이 예뻐하지 않았는지. 어른이 된 지금도 사람에게서 받지 못하는 위안과 사랑을 동물과 함께할 때 느끼진 않는지 말이다. 혹시 육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타입은 아닌가? 반드시 채식주의자가 아니더라도 고기가 별로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민감한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육식보다는 채식이 더 끌리는 경우가 많다. 나는 물 먹인 소, 강아지 공장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인간의 잔혹함에 치가 떨렸고 그 추악함에 분개했다. 소에게 성장호르몬과 항생제를 먹여가면서까지 고기를 많이 얻으려고 하는 발상에도 동의할 수 없다.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도살당하는 동물이 불쌍하지도 않냐, 그러니 제발 고기 좀 먹지 말라고 강요하지 않듯이, 채식을 하는 사람들에게 왜 채식을 하느냐며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즐기는 음식, 즐기지 않는 음식이 있고, 또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 선택한 식생활이니 존중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민감한 사람들 중에는 가축도살에 대한 반감 때문에 채식주의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동물의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이 그런 선택을 하게 한 것이다. 도살장에 끌려간 동물은 도축 당하기 전에 공포와 슬픔을 느끼고 죽는 순간 고통을 받는다. 이런 감정의 에너지가 고스란히 서려 있는 고기를 먹게 되면, 민감한 사람은 영향을 받게 된다. 도살 당시 동물의 심정이 담긴 고기가 몸속으로 들어가면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화가 나는 등 부정적인 마음 상태가 되기 쉽다. 내가 만난 상담사는 우울감이 있는 사람에게는 채식을 권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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