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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맞는 사주

3983일 근속이 내게 남긴 것

by angie 앤지


"회사랑 안 맞는다고요? 앤지님이요?"


1화 <회사가 안 맞는 사주>에서 이야기했듯, 내가 '회사랑 안 맞는 사주'라고 하니 모든 사람이 놀랐다. 하긴, 그렇다기엔 너무도 열심히- 무려 3983일째 이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이겠지. 그러게 말이에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치만 그 에피소드가 결국 이 시리즈를 만들었다.


작년 여름, 연재를 시작하기 전 썼던 토막글 하나가 있다. 회사로부터 장기근속 감사패(?) 같은 걸 받고 적었던 일기 비스무레한 것인데, 언젠가 장기근속 에세이를 쓰게 되면 마지막 에피소드는 이걸로 끝내겠다고 다짐했었다. (정말 써먹게 되다니, 어쩐지 감격!)





<2024년 8월 23일의 메모>


나는 일기를 꼬박꼬박 쓰는 학생이 아니었다. 아직도 방학 마지막 날, 신문을 뒤져 가면서 날씨가 어땠는지 과거의 예보를 겨우 찾아 해님, 구름을 그리던 기억이 선하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고, 20대의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처음으로 '내 20대가 이렇게 저물어 가는 게 싫다'라고 생각했고, 나의 이십 대를 회고하는 글을 써 보고자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기록이 익숙하지 않았던 탓일까? 생각해 보면 스스로 돌아보는 법을 아직 모를 때였던 것 같기도 하다.


어느덧 30대 중반이 되었다. 여전히 일기는 쓰지 않았지만, SNS에 스토리로 드문드문 흔적을 남기는 것에 만족하고 살 즈음. 덜컥(?) 회사에서 10년 장기근속을 하게 되었다. '뭐라도 남겨야 되는 거 아니야?' 이때 나는 또 한 번 밀린 일기의 중요성을 느끼며(…) 어떻게 나의 10+년을 유의미하게 맞이하고, 또 부드럽게 흘려보낼 수 있을지 고민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 글을 시작하게 되었다. 마치 30대 중후반에 쓰는, 나 자신을 키워내는 육아 일기랄까? 신입 때부터 12년 차가 되기까지 정말 많은 일이 있었고, 넘치게 분노할 때도 있었고, 드물게 기쁠 때도 있었는데... 비록 모든 순간을 매일의 일기로 명확하게 새겨 두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뭉뚱그려 놓았음에 더 아름답게 반추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도 같다. 원래 흐릿한 기억일수록 더 미화되는 법



10년, 유독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있다.


- 첫 직장의 아픈 기억을 뒤로한 채, 지금의 회사에 합격하고 '나는 다시 경제 인구다'라는 글을 올렸던 순간


- 신입사원 산행 때 혼자 다리 다쳐서, 에어컨 꺼진 버스에 홀로 남아 벌겋게 익어버린 순간 (첫 직장 연수 갔을 때도 발 접질려서 중간에 홀로 산을 내려왔던 기억. 산 안 가도 회사 10년 잘만 다닙니다..라고 적었지만 지난주 전사 워크숍에서 꼴찌로 산을 올라갔으니 이 부분은 수정합니다)


- 신입 때 의욕 과다로 열심히 SNS 콘텐츠를 만들었는데 결과물이 좋지 않아서 화장실에서 울었던 순간


- ENFJ에서 ESTJ로 MBTI가 바뀐 무의식의 순간 (엠비티아이를 기재하면 나중에 읽기에 굉장히 촌스러운 글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만큼 극단적인 변화를 보여 주는 표현이 없다고 생각해.. 미심쩍은 마음으로 활용합니다)


- 3년 차에 디지털 파트 선임이 되어, 그룹 미팅 가서 눈을 깜빡이면서 눈물 참았던 순간


- 선배를 육아 휴직으로 떠나보내며 주차장에서 짐 갖다 주면서 인사했는데, 복귀일에 다시 만나자마자 회사 로비에서 서로 쳐다보며 엉엉 울었던 순간


- 출산 휴가 가는 동료들에게 '다음에 돌아오면 내가 없을 수도 있어'라고 말했지만 항상 내가 있었던 순간 왜 맨날 있냐고


- 수많은 동료들을 다른 곳으로 떠나보내던 여러 순간


- 일도 많아 죽겠는데 해외 출장 갔을 때 틈틈이 새로운 거 보면서 행복해했던 순간


- 회사 사람들이랑 방탈출 게임 하러 갔던 순간 (회사를 탈출해야 더 웃긴 사람들)


- 외부 미팅하러 가서 긴장 맥스로 버벅거리고 식은땀 흘리며 소통하고 나와, TF 멤버들과 헛웃음 터졌던 순간


- 처음으로 회사에서 상을 받았던 순간과 칭찬을 받았던 모든 순간


- 내 손안에 10년 장기근속 감사패가 쥐어지던 순간


등등.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왜 눈물이 왈칵 나는지 모르겠지만.. 하루하루 그냥 열심히 버텨냈다고 생각했던 날들이 모이니까 10주년이라는 날도 오는구나 싶다. 또, 그런 나 자신을 다독여 주고 기특해하고 최선을 다해서 축하해 주는 것도 결국엔 나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많은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는 것도 좋지만- 이 시간들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고 누구보다 자부심을 가지고, 자신 있게 축하할 수 있는 건 나 자신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 글을 나중에 다시 읽어 볼 때를 상상하면, 내 삶에 정말 큰 의미가 될 것 같다. 나에게는 '일'이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고, '일을 하는 나'도 굉장히 중요하니까. 그리고 이 시간을 견뎌낸 '나' 또한 마찬가지고. 그걸 버티게 해 준 '모든 분들'에게 다시 한번 너무나도 감사하다.


신기하다. 십 년이라는 긴 시간이 지나왔는데도 많은 순간이 선명하게, 마치 오늘 쓴 일기처럼 남아 있다. 아마도 순간순간 최선을 다했고 진심을 다 했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거겠지? 10이라는 숫자는 완성된 숫자인 것도 같지만 어떻게 보면 아직 완성되지 않은 숫자이기도 하다. 그다음 어떤 숫자가 올 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나의 길을 묵묵히, 즐거워하는 일을 찾아 씩씩하게 한발 한발 걸어 나가고 싶다.


축하한다 십 주년!






뭐 이렇게 구구절절 길게도 썼지


어쨌든. 연재를 마무리하며, 이 일기를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다. 비록 '회사가 안 맞는 사주'로 태어나 살아온 날들이지만,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이 '회사가 맞는 사주'로 나를 담금질하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의 반 타의 반)


같은 회사, 같은 브랜드, 같은 팀에서 10년을 훌쩍 넘겨 일했다. 뭣도 몰랐던 3년, 버티기 바빴던 3년, 도망치고 싶었던 3년을 지나, 다시 잘 달리고 싶은 지금까지. 어디에도 말하지 않았던 진솔한 이야기를 이곳에만 풀었다. 그 여정을 함께 해주신 독자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누가 한 회사를 10년이나 다녀요>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마지막 뽀너스 에피소드는 Q&A, 무물과 감상 모음집으로 찾아뵙겠습니다.

혹시라도, 궁금한 점이나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시면 아래 폼에 남겨주세요!


질문/감상 남기러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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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소개

필명은 angie(앤지). 11년 차 뷰티 마케터이자 쓰는 사람.

일을 더 잘하고 싶어서 기록을 시작했고, 회사가 나를 힘들게 할 때마다 글을 썼다. 가능한 오래 피고용인과 작가 사이를 줄 타고 싶다. 아이돌, 야구, 뮤지컬 등 오만가지 좋아하는 것을 동력으로 살고 있다.


@angiethinks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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