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금 죽었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나는 죽어가고 있다.
시계 초침 소리가 귀에 새겨질 때마다, 이전의 ‘나’는 죽고, 그 자리에는 새로운 ‘나’가 들어앉는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의 ‘나’도 어느샌가 죽었을 것이다.
20년 전의 나는, 애완 물고기의 한 종인 구피를 직사각형의 투명 어항에 키웠었다.
한참 유년기였던 내겐, 그 투명한 어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양도 밋밋하고, 색도 밋밋해서였다.
투명 어항을 벼르고 벼르던 나날이 계속되었고, 어느 날 내 눈에 한 존재가 들어 왔다.
고래밥이었다.
네모나고 초록색의 그 고래밥 상자를 말하는 것이 맞다.
초록색의 고래밥 상자에서 헤엄치는 구피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리자마자,
나는 고래밥 상자를 두 손에 쥐고 헐레벌떡 뛰어가서 3살 터울의 누나에게 보여주었다.
이 상자에 키운다면 예쁘지 않을까, 동의를 구했지만,
누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절대로 거기에 옮길 생각 말라고 하였다.
나는 시무룩해져서 방으로 돌아왔다.
어항 옆에다가 고래밥 상자를 두고, 초록빛의 고래밥 상자에서 구피들이 헤엄치는 모습을 그렸다.
그렇게 5분쯤 흘렀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생각이 옳다고 느껴졌다.
구피들도 밋밋한 어항보다는, 초록빛 알록달록한 고래밥 상자를 더 좋아할 것 같았다.
바로 다음 순간, 나는 어항을 들어 고래밥 상자에 따랐다.
어항에서 물이 흘러내려, 고래밥 상자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무리 어항 물을 졸졸 따라도, 그 안에 물이 차오르지 않았다.
내가 천천히 물을 내려서 그런가 싶어서, 어항 안의 물을 한 번에 부어버렸다.
어항 안의 물고기도 그 물의 흐름에 따라, 고래밥 상자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항의 물을 모두 부었지만, 고래밥 상자에 들어있는 건 퍼덕이는 구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싶어, 고래밥 상자를 집어 들자, 상자의 밑부분과 윗부분이 서로 뚝 떨어졌다.
구피는 떨어진 밑부분에서 계속 퍼덕퍼덕 몸을 튕기고 있었다. 나는 졸래졸래 누나에게 갔다.
"누나, 종이컵에다가 물을 따르면 잘만 찼는데, 고래밥 상자에는 물을 따라도 물이 안 차올라."
그 말을 하자, 누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고선, 부모님을 불렀다.
부모님도 책상 위에 흥건한 물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은 어항에 새롭게 물을 채워주었다.
어항 속 물은 이전과 같은 것이 단 하나도 없었지만, 구피는 어항 속 물에 들어가자마자 이전과 같이 투명 어항을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나는 그날 종이는 물을 흡수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아쉽지만 구피는 투명 어항 속에 키우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이것은 지금의 내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나’이다. 지금 이 모든 것은, 지금의 내가 생각하는 ‘기억’이자, 미화된 ‘추억’에 불과하다.
부모님은 20년 전 그날을 기억하지 못하셨고, 누나는 고래밥 상자가 아니라 칸쵸 상자였다고 주장하였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다. 모든 것은 20년 전 그날, 그 시간의 ‘나’ 뿐만이 안다.
이렇듯,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다면, 그것이 ‘나’라고 할 수 있을까.
먼 과거이지만, 그 또한 나라고 한다면, 어린 시절의 내가 느꼈던 감정, 겪었던 일들을 기억해야 할 테지만, 나는 정확히 그 상황을 그리지 못한다.
먼 과거이기에, 내가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아니기 위한 과거의 시간기준이란 무엇인가. 하루. 일주일. 한 달. 일 년. 십 년. 이 중에, ‘나’가 아니기 위한 시간기준이 존재할까.
지금 순간. ‘나’는 지금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지금이 지나가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새로운 ‘나’가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 쌓여가는 시간 속에서, 신선한 ‘나’들이 늘어가고, 늘어 난만큼 부패 된 ‘나’들은 폐기 처분 된다.
마치 ‘테세우스의 배’처럼.
테세우스의 배란,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아테네에 복귀할 때 타고 온 배를 지칭함과 동시에, 아테네인들이 테세우스가 타고 온 그 배를 보존하며 발생한 일을 의미하기도 한다.
테세우스의 배는 나무로 만들어졌기에, 시간의 풍파 속에서 차츰 썩어갔다.
아테네인들은 배의 판자가 썩으면, 썩은 판자는 떼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판자를 덧대었다.
그렇게 썩어가는 것을 하나둘 바꿔가면, 언젠간 당시 테세우스가 탔을 때 있던 판자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 배는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를 처치하고 돌아올 때 탄, 그 배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배와 동일한 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이미 지나간 시간과 동일한 시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시간이자 ‘나’가 존재했다는 증거로서, 우리의 기억을 제시하지만,
그것은 재구성 되어 진 그림에 불과하다.
시간의 풍파 속에 버틸 수 있는 존재는 없다.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아스러지기 마련이다.
‘테세우스의 배’가 그러하였다. 그리고 ‘기억’ 또한 그 법칙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억은 마모되고, 우리는 자신의 기억이 마모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마모된 기억을 꺼내 들고, 훼손된 명화를 복원가는 복원가처럼,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추억’이라는 형태로 미화한다. 기억을 뜯어내고, 새로운 기억을 덧붙이고, 일련의 과정 끝에 결국 정확한 기억은 그 속에서 남아있지 않다.
그 복원한 기억조차 시간의 풍파 속에서 다시 마모될 것이고, 모습이 마모되면 새로운 기억으로 복원되어 ‘추억’이라는 형태로 미화되는 과정을 반복할 것이다.
그렇게 복원에 복원을 걸친 끝에, 결국 그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존재했던 ‘나’는 사라진다.
시계 초침이 새겨질 때마다,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가 썩어간다.
썩어가는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를 떼어내고, 싱싱한 ‘테세우스의 배’의 판자를 덧댄다.
시계 초침이 새겨질 때마다, ‘나’의 기억이 썩어간다.
썩어가는 ‘나’의 기억을 떼어내고, 싱싱한 ‘나’의 기억을 덧댄다.
이렇게 만들어진 ‘테세우스의 배’는, ‘테세우스의 배’일까. 이렇게 만들어진 ‘나’는, ‘나’일까.
단 하나의 시간, 단 하나의 테세우스의 배, 단 하나의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무수한 시간 속에, 무수한 테세우스 배와, 무수한 ‘나’가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무수한 '나' 사이에서, 지금의 '나'에 충실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