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터슨과 패터슨, 그리고 패터슨의 첫인상
명절 저녁에 조용히 혼자 보기에 적당한, 시로 숨 쉬는 듯한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짐 자무쉬의 영화는 딱 하나, '커피와 담배'만을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와 그의 필모그라프를 검색해보니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라는 뱀파이어 영화도 보았었다. '브로큰 플라워'는 개봉 당시 몇 명의 추천을 받았었고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놓쳐 버렸었다. 그리고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쩌면 아주 예전에 '천국보다 낯선'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를 많이 보는 편도 아니고 유심히 기억하려는 편도 아니다 보니 까먹는 일이 자주 있다. 영화를 봐놓고도 까먹고 안 봤다고 우기는 경우도 있고, 재밌게 보고서도 제대로 요약해서 타인에게 전달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감상을 글로 남겨놓는 일은 그래서 중요하다.
짐 자무쉬의 영화를 로드무비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를 부정할 수는 없지만 로드무비라고만 설명하기 충분치 않은 느낌이다. 어쩌면 그저 희미한 인상 같은 것인데, 공간과 지역뿐 아니라 사람들 간의 관계 사이 어딘가를 떠돌고 유영하는 느낌이 그의 영화에는 있다. 어느 영화나 타인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겠지만, 짐 자무쉬의 영화를 감상하는 동안만큼은 지구 상에 실재하는 중력이나 현실과는 조금 다른 무게감으로 생각지도 않았던 삶을 이해해 볼 수 있는 체험이 되고, 기묘한 설득력으로 어느 순간 타인의 삶을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 제목도, 도시도, 주인공의 이름도 패터슨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동안 이 모든 고유명사들을 구분해가며 적어야 한다는 것이 조금 번거롭게 느껴진다. 그저 '패터슨의 첫인상'이라고 적어버리면, 어느 패터슨의 첫인상이라는 것인지 알 수가 없게 된다.
일단 도시 패터슨의 첫인상이다.
애초에 버스에서 보여지는 풍경이나 사람들 모습이 그렇게 다정하거나 아름답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저 그런 소도시의 시시하고 낡은 느낌 같은 것이 있었다. 주인공 패터슨의 루틴한 일상을 통해 보여지는 도시였기에 더 별 일 일어나지 않는 느낌이었을 수도 있다. 어느 정도 유명한 장소나 그곳 출신의 유명인이 있지만, 딱히 관광객이 많은 지역도 아닌, 느리고 작은 도시였다.
인간 패터슨은, 매일의 반복적 일상을 잘 굴려가는 듯 보이지만 운전이라는 일을 하면서 머릿속으로 시를 생각하거나 사람들의 대화를 듣거나 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패터슨이 사고를 내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졌다. 게다가 조용하고 감정표현이 적어 보이는 패터슨이 틈틈이 시를 적을 때에는 누군가 방해할까 봐 계속 불안했고, 패터슨이 누군가의 노크나 대화 때문에 시상을 잊진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방해받지 않는 상태에서 창작한다는 것이 조금은 쉽지 않은 일이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로라의 꿈 이야기를 시작으로 쌍둥이가 계속 나오는 것도 이상했다. 패터슨이라는 도시에는 원래 쌍둥이가 많은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쌍둥이를 자주 보여주면 기괴한 느낌이 들 것이라 생각한 것인지, 어째서 쌍둥이를 보며 불안한 생각이 들게끔 유도하는 것인지 감독의 의도가 애매하다고 느꼈다.
패터슨과 다르게, 로라의 성향은 활달하고 외부적으로 표현하는 성향이 다분하며 자신의 예술적 욕구를 이야기하는데 거침이 없다. 패터슨의 시를 칭찬하며 고무시키려 애쓰지만, 패터슨이 그 말에 그렇게 기뻐하는 것으로 보이지도 않는다. 패터슨은 로라나 다른 이들의 인정보다는 자신을 위해서 시를 쓰고, 그저 시를 쓰게끔 역할 지어져 있기에 기계처럼 시를 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친밀한 관계의 두 사람이 성격, 성향이나 표현방식,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 가치관, 지향점 등이 꽤나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난 조금 더 불안해졌다.
사실 불안한 존재는 또 있었는데, 바로 마빈이라는 이름의 개였다. 나는 마빈 같은 불독 류의 개 이미지를 귀엽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 편인데, 이 영화에서는 이상하게도 그릉대는 소리를 낸다던지 과도한 연기를 보인다던지 하는 장면들에서 약간 불쾌함까지 느꼈다. 물론 마빈에 대한 불안함은 아마도 의도된 것이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영화 패터슨을 막 보기 시작했을 때, 이런 불안해 보이는 요소들이 분명히 어떤 불행의 씨앗이 될 것이라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 패터슨에 대한 첫인상은 불안과 답답함이라고 적겠다.
로라는 패터슨의 시가 매우 아름다우니 시작노트를 반드시 복사해두라고 부탁한다. 패터슨은 내키지 않아 보이지만 그러겠다고 약속한다.
복제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고, 나 자신을 복제한다면 그 복제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패터슨이 복사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그에게 시란 자기 자신과도 같아서 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라가 쌍둥이 꿈을 언급한 이후에 패터슨이 마주치던 각기 다른 쌍둥이들은, 아마 패터슨이 시의 원본과 복제에 대한 고민과 강박에 휩싸였다는 의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시 쓰는 아이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뒤 그 아이도 쌍둥이인 것을 알았던 날, 패터슨은 저녁 메뉴보다 물을 더 많이 마시며, 시작노트를 복사해 두겠다고 로라에게 다시 약속해야 했다.
그러나 처음 영화에서 느껴지던 불안들을, 영화 패터슨은 껴안고 간다. 패터슨과 로라 역시, 서로의 명백한 다름을 껴안고 관계를 유지한다. 다름은, 그들에게 불안할 것이 아니었다. 로라가 두 사람의 집 안에서 만들어내는 흑백의 패턴처럼, 그들은 명확하게 다르지만 서로의 다름과 차이를 유연하게 넘기고, 상대방이 잊은 것을 짚어주거나 수정해 주고,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아간다. 정반대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관찰하고 인지하며 차이를 그들만의 패턴으로 만들어낸다. 그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때론 못마땅한 부분이나 어려운 요청도 거부하지 않으며, 그것이 함께 하는 삶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흑백이라는 것의 시각적 대비는 크다.
로라의 창작품과 수집품을 제외하고도, 이 영화 전반에 흐르는 흑백의 이미지는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사실 패터슨은 백인이고, 로라는 피부가 검은 편이다. 바의 장면에서는 패터슨을 제외하고 거의 흑인들만 나온다. 그들 중 몇몇은 흑백의 컬러로 이루어진 체스를 둔다.
아마 인종이나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던 것은 아닐 것이다. 받아들이기 나름이겠지만 시각적 메타포라고 생각된다. 이를테면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다'라는 표현을 말 그대로 이들에게 적용해 본다면, 패터슨이 종이이고 그의 삶에 로라라는 글씨가 적혀 그들이 함께하는 삶이 시가 된다는 뜻 정도로 이해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종이가 하얗고 글씨가 검지 않으면, 그러니까 종이와 글씨가 모두 하얗거나 모두 검다면, 시는 적혀있다 해도 읽힐 수 없다. 흑백의 대비라던지 로라와 패터슨의 차이가 있기에, 시는 형태를 갖고 읽히며, 삶은 서로 얽히며 어우러지게 되는 것이다.
신기했던 것은, 처음의 불안감도 영화를 보면서 점점 사라졌고 안심되었다는 것이다. 처음의 불안요소가 사라지거나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화 속 시간이 흐르며 나는 패터슨과 로라 각각의 세계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며 점차 그들을 신뢰하게 되었고, 그들의 관계가 견고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영화 패터슨은 차이에서 오는 불안을 이미 깨닫고 인정하는 사람들이 다음 단계로 진행한 후의 이야기이며, 그저 의미 없는 검은 글씨와 그저 단순한 흰 종이가 아닌, 그들 흑백의 대비를 이용해 시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시로 시작하며 시로 숨 쉬다가 시로 끝나는 이 영화에서 시작노트의 소멸은 가장 큰 위기이다. 비록 소멸되지만, 흑도 백도 아닌 어떤 사람, 시와 시인에 관한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지만, 독특한 억양의 Aha!를 남긴 일본 시인에 의해 새로운 노트가 생긴다. 그리고 스스로를 시인이라 부르지 않은 패터슨은 새 노트에 시를 적기 시작한다.
아마 나중에 시인이 된 패터슨의 전기가 있다면 이렇게 시작될지도 모른다.
"패터슨이란 작은 도시에 패터슨이라는 시인이 있었지. 그는 버스 운전사였어. 그의 첫 시집은 개가 물어뜯어 버렸기에 남아있지 않다고 해."
흑과 백의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그렇게 패터슨의 시는 다시 시작된다.
새로 시작하는 다음 날처럼. 그리고 고장 났다가도 다음날이면 다시 운행되는 버스처럼.
짐 자무쉬가 시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그의 이름을 검색했을 때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였다. 그런 점을 생각해 보았을 때, 어쩌면 그는 종이와 무수한 검은 글씨, 같은 자리를 버스노선처럼 반복해서 맴도는 생각들과 아름다운 영감, 그 모든 것들을 의인화하여 패터슨이라는 영화로 만들어냈다고 생각된다.
패터슨은, 패터슨을 버스로 돌며 삶이라는 시의 운율과 라임을 만들어 낸다. 시의 맨 첫 줄은 월요일, 다음 줄은 화요일로 표시된 것인지도 모른다. 우연인지 몰라도 패터슨이 "I stop"이라는 시구를 적었을 때, 마침 그의 버스는 멈추어 버린다.
패터슨이 시를 적어내기 위한 기본 조건들인 글씨, 테마이자 영감은 로라와 함께하는 생활이다. 저녁에 바에 들러 만나던 다른 사람들 역시 패터슨의 시를 이루는 시어들이다.
그리고 로라에 대한 사랑의 시를 적어 내려가던 저녁, 커플은 흑백영화를 보러 가고 마빈은 시집을 찢어버린다. 마빈은 무엇의 비유일까?
어쩌면 영화 속 모든 것은 시에 대한 비유이고, 누군가 Aha!하며 깨달을지도 모른다며 감독이 장난스럽게 숨겨놓은 설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알 수 없듯이, 일부러 숨기듯 배치해 놓은 모든 영화 속 메타포의 의미를 우리가 매번 알아차리며 Aha!를 외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아마도 영화에 나오는 실존 시인,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의 시를 잘 안다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지도 모르겠다.
짐 자무쉬가 영화 패터슨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는 모두 시를 이루는 시어이고 우리의 삶이 곧 시라는 것일지 모른다. 그리고 감독 역시, 자신의 영화를 시 그 자체로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즐거워하고 있을 것 같다. 내용 자체가 시적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영화를 구현해낸 그 형식이나 구성된 과정 자체가 시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패터슨, 다 보고 나서 의미를 짚어가며 글을 쓰는 동안, 진화하듯 점점 더 재미있어진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