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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하늘이 허락해 준 시부모님의 간병, 허락해주지 않은 결혼식



하늘은 내게 결혼식을 허락해 주진 않으시고, 시어머니 간병은 허락해 주셨나 보다. 


시댁 다락방에서 신혼방을 차린 나에겐


결혼을 반대하는 친정과 결혼'식'을 반대하는 시댁 덕분에 결혼식 마저 사치스러운 일이 되었다.


여기서 전자가 반대하는 과정은 진정 자식을 위한 결정이 아니었고, 후자의 반대는 자식들을 위한 반대였다는 것까지만 밝히는 게 좋겠다.


분명한 건, 모든 상황에도 불구하고 나는 결혼 전보다 결혼 후가 훨씬 더 행복하다는 점이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다음 생에도, 이 사람과 또 결혼하고 싶을 만큼 후회는 없다. ^^


시부모님이 함께 외출하시면 반드시 함께 돌아오시고, 함께 손을 잡고 정기 검진이나 병원을 다니실 정도로 화목하고 안정적인 환경이었고, 그런 시부모님을 쏙 빼닮은 남편 성향 덕분에 가능한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 마음에 식을 올리지 '못'했다는 생각은 친구나 지인들의 깃털 같은 한마디에도 마치 칼에 베인 것 같은 아픔을 주기도 했다.


지금이야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는 남편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그때는 자존심만 높고, 자존감은 낮았던 시기였기에 지인들 사이에서 내가 어촌으로 시집가서 식도 안 올리고 시댁에 얹혀 산다는 소문이 도는 것만큼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허허..


정작 나는 생전 처음 받는 관심과 사랑에 그토록 행복했으면서도 말이다.


이래서 피해의식이 참 무섭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지 못하게 하니 말이다.  




남편과 나 사이엔 아무 문제가 없었지만, 사건을 받아들이는 나의 생각과 사고방식엔 상당히 문제가 있었다.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면 끝도 없었으니까.


백화점도 없고, 대형 영화관도 없고, 티비도 없고(정확히 말하면 모니터는 있지만 방송을 볼 수는 없었다), 소파도 없고, 침대도 없고..


결혼 전에 당연하게 누리던 것들을 잃어버리는 대신 남편의 사랑을 얻었지만, 욕심이 많은 나는 원래 누리던 것들까지 모두 누리고 싶었으니까.  


욕심이 많으면 괴로움도 커지는 법이다..


그런 나를 하늘이 참 교육이라도 하시려는 것인지, 아니면 운명이지 모르겠으나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가는 사건이 생겨버렸다.


바로 시어머니에게서 희귀 암이 발견된 것이다..




신혼 초기 1년만 시댁에서 살면 될 거란 믿음으로 함께 했던 시간들이 11년이 되어버린 포문은 가볍게 생각했던 시어머니의 갑상선 문제가 검사 과정에서 암 발견으로 이어지며 열렸다. 


무려 10만 명에 1명이 걸린다는 아주 희귀한 암으로, 시외가 쪽에 병력이 있는 암이었다.


여자들이 시댁살이 화병으로 흔히들 걸린다는 유방, 자궁이나 위나 갑상선도 아닌 곳이고 치료약도 없는 병이라 진단한 주치의 선생님도 당황하셨다.


완치약도, 완치율도 미지수인 데다 하필 코 안쪽 점막에 생기는 바람에 발견도 늦어졌고.. 본가가 있는 지방 어촌에선 최신약이 있다 해고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우린 백방으로 어머니의 완치를 위해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일본 쪽 병원까지 알아보느라 모든 일이 올스탑이 되어버렸다.


결국 본업까지 그만두고 간병에 매달려야 할 상황이 왔다.


종손인 남편과 종부인 내가 어머니를 버리고 일을 나갈 수는 없었으니..


당시 남편에게 들어온 방송들이 수십개고, 수도권 대학의 교수 제의도 몇 번 있었지만.. 그게 어머니보다 중요할 수는 없었다.


2015년에 미 대통령 지미 카터가 면역항암제 키트루다 투여 후 어머니와 똑같은 병이 완치되었단 소식을 들었고, 그 약을 쓰기 위해 서울까지 오가느라 남편이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드디어 치료약이 발견됐다! 라고 하면 완치를 눈앞에 둔 것처럼 온 가족이 들뜨고,


그게 2차에도 효과가 없었다!라고 하면 다시 온 세상을 잃은 것 같이 우울해지고..


다시 3차에 기대를 걸며 서울까지 당일치기로 다녀오면 다음날까지 넉다운이 되고..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은 롤러코스터였다고나 할까.


그 와중에 친구들은 잘 지내냐고, 결혼식하면 꼭 불러달라는 그런 애정어린 말들조차 들어줄 힘도, 대답할 힘은 더더욱 없어 어느 순간 자연스레 연락이 끊어져버렸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래도 이때는 희망이란 불씨가 남아있던 시기였으니..


나중엔 이보다 더 힘들어질 거란 생각은 상상조차 못 했다.


사람 인생, 참 알 수 없다.


이후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도록,

남의 불행을 쉽게 보지 말자고도 다짐했다.


드라마에서 나올법한 일보다 더한 일들도 순식간에 생기는게 인간세상이고, 건너들은 지인의 소식들이 언젠가 내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는 걸 뼈저리게 체감했기에..

당시 수업 휴강 증빙자료로 찍어두었던 간병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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