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엄마를 사랑했지만
"네가 사랑을 알아?"
쌍둥이 중 큰 아이는 어릴 적부터 언어감각이 남다른 편이었습니다. 아이답지 않은 말을 하거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해서 저를 놀라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지요. 게다가 감정 표현을 어찌나 거침없이 하던지 걱정과 우려를 하게도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여섯 살 때의 일입니다. 마을에는 같은 어린이집을 다니는 또래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같은 나이의 여자 사촌 지민(가명)이가 있었는데요. 몇 번 놀러온 걸 본 적이 있었던지라 저희 아이들과는 얼굴을 알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주말이라서 지민이가 놀러왔던 모양입니다. 아이들은 친구네 집에 내려가던 길이었는데 올라오던 지민이와 마주치게 되었습니다. 그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큰 애가 길에서 마주친 지민에게 대뜸 "나랑 결혼할래?"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여러 본 같이 놀았던 사이도 아니고 두세 번 본 게 다였는데 말이죠. 지민은 그 말을 듣고 순간 얼굴이 굳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인데다가 왜 우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어 저는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이가 그 순간, 지민에게 작은 목소리로 “그럼, 난 어때?” 라고 말하는 소리를 저는 듣고야 말았습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은 왜 이러는 것일까요? 저는 그 광경을 뒤에서 모두 지켜보았는데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저는 아이에게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낮에 지민에게 했던 말, 그거 진짜 그럴 생각이었어?” 라고 물으니 “네. 그럼요” 라고 자신 있게 답을 합니다. 어허. 이 놈 봐라. 그러면서 덧붙여서 하는 말에 저는 기가 막혔습니다. “예전엔 엄마를 사랑했지만 지금은 제 여자 친구인 지민이를 더 사랑해요 ” 라고 말을 하네요.
뭐라고? 어른들이 말하던 아들 낳아 소용없다는 말이 정녕 이런 느낌일까요? 아이의 대답에 저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을 하면 우리 집을 나가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데 괜찮겠어?” 그 전까지만 해도 흔들림이 없던 아이는 고민하는 눈치였습니다.
몇 분 동안 고민을 하더니 이윽고 하는 말은 “그냥 집으로 같이 들어와서 살면 안 되나요? ” 라고 말을 합니다. ‘이런, 그래, 내가 졌다.’ 싶었습니다. 과연 여섯 살 아이가 생각하는 사랑의 감정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여자 친구' 라는 단어를 또박또박 말하는 아이에게 외치고 싶었습니다. “네가 사랑을 알아?” 라고 말이지요.
아이들과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기 위해 고른 책은 사노 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입니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를 참 좋아하는데 이 그림책 역시 언제 읽어도 좋습니다. 내용도 좋아하지만 특히 고양이가 주인공이라서 저도 아이들도 좋아하는 그림책입니다. 이 책은 사랑이라는 주제 외에도 나답게 산다는 것에 대하여, 혹은 죽음에 대한 애도와 슬픔 등으로도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책입니다.
이 그림책의 주인공은 백만 번이나 살고 백만 번이나 죽은 얼룩 고양이입니다. 백만 명의 주인이 이 고양이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자신만을 사랑했던 고양이는 아무렇지 않아합니다. 그러던 고양이는 흰 고양이를 만나게 되고 진짜 사랑을 하게 되었습니다. 흰 고양이가 죽자 고양이는 백만 번을 울고는 더 이상 태어나지 않게 됩니다. 삶이란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라는 것을 전해주는 그림책입니다.
고양이가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후회 없는 삶을 살았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혹은 뒤늦게 사랑하게 된 흰 고양이를 잃게 되자 다시는 슬픔을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저자는 백만 번 산 고양이를 통해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들려줍니다. 얼룩고양이는 주인들에게서 보살핌만 받고 스스로 누군가를 선택하여 보살피고 돌보아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흰 고양이를 선택하고 사랑을 하게 됩니다.
아이가 사랑이 뭐냐고 물어온 적이 있나요? 그 질문에 사랑은 뭐라고 답을 해주셨나요? 사실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명확한 답을 해주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 흔하고 당연하게 느껴지는 요즘에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랑만큼 사람들의 삶에서 중요한 것도 없겠지요. 우리들 모두가 고유한 개성을 가지고 있듯이 각자의 마음에 담긴 사랑 또한 모두 특별합니다. 어느 것 하나 똑같은 사랑이 없으며 각자의 사랑은 자기만의 빛깔을 뿜어냅니다. 그림책을 읽으며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야함을 다시금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