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태어나긴 저기, 자란건 거기, 지금은 여기.
제주 온 지 벌써 1년, 종종 서울에 올라가면 뭐하러 이 고생을 하며 올라왔지 싶다가도 여기가 내 고향이긴 했구나 싶을 때가 있다. 한달 전쯤인가, 명절 전에 을지로 서촌 일대를 거닐면서 들었던 생각이 분명 그것이었다. 와, 나 서울 좋아했네. 서울 너무 좋아하네. 날씨마저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날. 아, 그래. 날씨가 아름답지 않았다면 그만큼의 소회가 크진 않았을 터였다. 장시간 이동으로 인한 피로감도 잊고 길따라 전시회 들어가고 골목골목마다 있는 맛있는 커피집과 예술을 사랑하는 이들이 큐레이팅한 서점, 북카페, 전시공간, 셀러마켓 구경구경구경. 정말이지 흠잡을 것 없이 아름다운 서울 그 자체였다.
사실 서울을 안좋아한다기보다는 그 빡빡하고 팍팍한 생 자체에 고통을 겪는 편이라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애인과의 기념일, 모친의 생신을 맞아 서울행을 감행했는데 역시나 피로하고 힘이 들었다. 그냥 집에서 엎어져서 쉰 날이 언제던가, 아득해지기만 하더라고. 정말 언제지. 사실 기억도 안난다. 분명 한 달에 한두번은 꼭 그런 날을 집어넣었는데. 11월을 헤어보아도 똑같다. 영 나오지가 않는다. 아무것도 안하고 누워있어도 되는 날이. 아무튼 주중엔 밤낮으로 일하고 주말엔 서울행 혹은 일을 병행하는 일상. 이게 지금 쉼이란 것이 분명 존재하는 삶이던가.
왜 제주까지 왔던 것이지? 큰 것을 바란 것도 아니다. 쉬는 것도 말이지 그냥 잠들기 전 한두시간 게임하거나 책읽거나 글쓰거나 티비보거나. 그것도 아니면 그냥 핸드폰 하거나. 그마저도 안되면 샤워를 하거나 또는 애써서 맛있는 걸로 요리를 해먹었다거나. 딱 이정도를 바랬다고. 이토록 쉬지 못한 상태임에도 굳이굳이 비행기를 타고 서울행 일정을 강행하는 데에는 다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다. 그리고 대체로 피로와 만족감을 얻는다. 참 이상하지.
이번에 올라가서 나름 새삼스럽게 느꼈던 것은, 나는 서울말 쓰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왔으며 나도 서울말을 쓰는 사람이고 또 내가 좋아하는 많은 이들은 서울에 가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제주에서 좋은 동료와 아는 사람들이 생겨 점차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요즘, 제주말과 제주 삶에 익숙해지고 있었는데 가만보면 내가 출신이 어디었는지를 자주 까먹는단 말이야.
서울에 가니 익숙한 동네, 잘 알던 거리, 좋아하는 친구, 가족, 애인과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내는 시간들. 잠이 들 때서야 내가 많이 피로했구나 그제서야 깨닫게되는 이상한 도시. 엄마가 그러더라. 그래서 사람들이 고향, 고향 하는거라고. 아무리 새 지역에서 오래 살았다 해도 고향에 오면 남다른 게 있다고. 그렇구나, 나에게도 고향 비슷한 게 있긴 했구나. 살며 이사를 50번 이상 경험하면서, 1~2년 이상 거주한 도시가 열 손가락 가까이 되는 인생이었기에 ‘고향’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저건 내 사전에는 없는 단어라 생각했는데 말이지.
두 달 뒤, 3월이면 지금의 집에서 이사를 나간다. 1년 하고도 두 달을 채우고 이사가는 셈인데, 그 이유라함은 지금보다 조금 더 넓은 집에 살 수 있고 LPG가 아닌 도시가스를 쓸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단점이라함은 꽤나 번화된 곳으로 이사하는 것이라 한적하고 여유로운 느낌이 덜 날 것 같다는 것과 집에서 한라산이 안보인다는 것 정도. 집 근처에 단골이 된 베이커리 카페와도 인연이 끊기는 것도 단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사를 가는 것에 최종적으로 결의할 수 있었던 것은 한달에 두어번 복도 청소가 되었을 때 나는 그 특유의 냄새 때문이 크다.
그 냄새는 이전 직장에서 고생하던 시절, 그 겨울과 봄을 기억나게 한다. 지금의 집은 이미 충분히 내 공간으로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데도 우연찮게 어느날 갑자기 복도 물청소가 끝난 날에 그 냄새를 맡아버리면 바로 몇 달 전의 기억 속으로 빠져버린다. 그 기억이 좋고 싫고를 떠나 아직까지도 따끔따끔한, 아주 이상한 감정이 들게 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다. 내년에도 지난날의 기억에 발목잡히고 싶지 않으니까 이사가 나쁜 선택일 수가 없지. 과거의 복잡한 감정들이 뒤엉킨 기억은 시간이 다소 지나야 환영받지 않는가.
게다가 지금은 동쪽에 사는데 이사를 가는 곳은 서쪽. 지금은 중산간 마을인데 이사가는 곳은 해안마을. 제주에 모든 것을 단 몇 년안에 전부 경험하겠다는 요망진 계획은 아니지만, 여러모로 끌리는 선택이었다. 지난 여름을 함께해준 풀벌레 소리, 가을 겨울 내내 싸늘했던 방바닥, 매일같이 한라산의 절경이 보이던 이 집도, 한적한 이 동네도 이제 곧 안녕. 새로운 내일을 새기고자 새 공간으로 떠난다.
새로운 공간에서 새로운 일상을 쌓아가다보면 언젠가 제주도 마치 서울처럼 뗄레야 뗄 수 없는 어떤 의미가 되지 않을까. 그러다 또 제주마저 떠나는 날이 오면, 시간이 부쩍 지나 제주에 방문해서는 여기를 무엇이라 부르려나. 고향 비슷한 무언가가 자꾸 생겨나는 유목민의 삶. 그러니 계속 이사를 떠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