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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May 16. 2022

우크라이나 전쟁이 내 일상까지,

속는 사람이 바보인가. 속이는 사람이 바보인가.

봄이 성큼 다가왔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얇아지고 얼굴 표정도 한층 가벼워졌다.


따스한 봄기운을 느끼며 산책도 할 겸 마트에 장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확실히 코로나 확산세가 잦아들어 방역 조치가 완화되면서 관광객도 많이 늘었다. 베르사유 궁전 정문 앞 주차장에는 관광버스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고 프랑스어가 아닌 다른 언어들도 길거리에서 자주 들렸다.

 



오늘 저녁을 위해 파스타 면과 소스, 레몬, 샐러드 등 간단하게 장 봤다. 또 봄을 맞아 집안 분위기도 바꿀 겸 튤립 꽃과 노란 동그라미 패턴이 들어간 컵도 샀다. 기분 좋은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갑자기 한 남성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약간 통통한 몸에 40대 중반 정도 돼 보였고 그 옆에는 40대 초반의 아내로 보이는 여성이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 있었다. 베르사유 동네는 워낙 관광객들이 많아 가끔 산책하다 보면 길을 묻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놀랄 일은 아니었다.


그 남성은 나에게 물었다. « 혹시 러시아어 할 줄 아세요? » 러시아어를 할 줄 아냐고 나에게 물어본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시아인 중에서는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에서 말이다. 나는 모른다고 답했다. 그는 « 그럼 영어 할 줄 아세요? » 라고 되물었다. « 네 » 라고 나는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핸드폰을 꺼내 구글 번역 앱을 켜더니 러시아어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알아듣지 못했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어떤 어려운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어로 된 번역본을 나에게 보여줬다.


내용은 이러했다.

« 저는 우크라이나 마리우풀(Marioupoul: 우크라이나 동부에 위치한 도시, 현재 러시아 군대와 전쟁 중인 곳)에서 온 우크라 이인입니다. 지금은 헝부이에(Rambouillet: 기차로 30분 정도 소요되는 베르사유 아래 동네)에 머물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힘들고 배가 고픕니다. 저희를 도와주세요. »


미디어에서만 듣던 우크라이나 전쟁이 나의 일상생활까지 다가오자 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사실 이 순간, 현실에서 동떨어져 살다가 갑자기 현실로 소환된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살아 있다'고도 느꼈다.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는 서둘러 먹을 것이 있나 장바구니를 뒤져보았다. 하지만 바로 먹을 수 있는 완제품은 없었다.


« 죄송해요. 제가 먹을 것이 없어요..»

« 혹시 괜찮으시다면 파스타 재료라도 드릴까요?»


그러자 그 남성은 갑자기 손을 절레절레 흔들며 핸드폰을 꺼내 다시 러시아어로 말하더니 나를 보여줬다.

«Give me money 돈을 주세요..»


나는 순간 흠칫 하며 그 남성을 쳐다보았다. 그는 흐흐흐 울음소리를 내더니 눈물을 훔치는 제스처를 취했다.하지만 눈에선 눈물이 보이지 않았고 입은 울고 있지만 눈은 그대로였다. 실제로도 현금이 없었을뿐더러 ‘돈’을 요구하자 갑자기 그의 진정성에 의심을 들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도와드리고 싶지만 제가 현금이 없어요.»






집에 도착해서까지 기분이 찜찜했다.

'많은 사람이 지나가는 길에 왜 아시아인이 나에게만 말을 걸었을까?'

'혹시 아시안인들은 거절을 못하고 친절해서?'

'헝부이에(Rambouillet)에서 머물고 있는데 베르사유는 어떻게 온 거지?

'피난민이 맞는 걸까?'


또 한편으로는

'진짜 어려운 상황이면 어쩌지?'

'내 마음대로 판단한 것은 아닐까?..'

'그들에게 더 상처를 줬으면 어쩌지?'

그들을 돕지 못했다는 것이 양심에 가책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라도 길 가는 사람을 잡고 ‘돈’을 달라고 하는 건…

집이 없어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지하철에서 생계가 어려워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도 소위 말하는 '대 놓고'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진실은 무엇인지 나도 모른다.

나는 그들을 진심으로 돕고 싶었고 그들은, 나에게 현금을 요구했다.


마음이 편치 않다.


상황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선한 마음을 움직여 이득을 취하려는 사람들.

속는 사람이 바보일까.

속이는 사람이 바보일까.


우리는 점점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기 시작한다.

그립다. 의심 없이 선의를 베풀던 그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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