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77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배가 아팠다. 배탈이 났나. 화장실에 갔다가 임무수행을 마치고 다시 화장실에 갔다. 괜히 잘못 먹으면 더 심해질까 봐 언니가 깎아두신 사과만 먹었다. 커피도 데워져 있기에 마셨다. 오늘 점심엔 원래 주리 언니를 만나기로 했었는데 민박집에 일이 생겼다고 하셔서 또 취소되었다. 결국은 내가 내일 민박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아침 먹고 바스티유 시장 들려서 바지랑 과일 사고 가야지.
쉬고 있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부르셨다. 마트에서 장을 보고 카트를 끌고 오셨는데 그걸 나보고 다시 갖다 두라고 하셨다. 어이가 없었다. 뜬금없이 쉬고 있는 사람 불러서 부탁도 아닌 명령을 하다니. 기분이 굉장히 나쁘고 귀찮았지만 “싫어요.” 또는 “제가 왜요?”라고 대답하기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냥 세수만 하고 갔다. 나에게 예의가 없는 사람에게 예의를 차려야 하는 인생이라니. 좀 씁쓸하고 거지 같다. 그래도 마트에 간 김에 하리보 젤리를 샀다. 달랑 젤리 하나 사는데 시간이 엄청 걸렸다. 사람이 많기도 했고 마트 점원도 싸가지가 없었다. 나한테는 인사도 제대로 안 하더라.
아무튼 다녀와서 점심을 먹고 준비를 한 뒤 퀵 보드 라이딩을 즐기러 나갔다. 오늘은 70번 버스 노선을 따라가기로 했다. 그러다 우연히 작은 벼룩시장을 만났다. 신나게 구경하는데 프랑스 자연 사진 책을 발견했다. 가격도 8유로로 저렴했고 책의 상태도 굉장히 좋았는데 살 수는 없었다. 너무 크고 무거운 책이었기 때문이다. 당장 사서 집에 가는 건 별 문제없었지만 한국에 가지고 갈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내가 갈 때, 올 때, 두 번이나 그 책을 만지작거리자 주인아저씨가 원래 가격은 34유로라며 8유로면 엄청 싼 거니 사라고 권했다. “C’est lourd” 하자 옆 아저씨에게 봉투를 빌려서 담아주더라. 고민하다 “non, non pardon” 하고 돌아섰다. 조금 죄송하긴 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살 수는 없었다. 열심히 70번 버스 노선을 따라가니 골목 사이사이의 가게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공사 중인 구간도 있고, 도로 상태가 좋지 않은 곳도 있어서 조금 힘들었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퐁네프! 그곳부터 다시 앙발리드 까지 쭉 길을 따라가고, 체력적으로 한계를 느꼈지만 포기하지 않고 집으로 왔다. 엘리베이터에서 할아버지를 만났다. 집에 오니 땀이 주룩주룩 났다. 무슨 가을 날씨가 여름 날씨보다 좋냐. 조금 쉬다가 오후 임무수행을 마치고 저녁을 먹었다. 그런데 8시가 채 되기도 전에 저녁 뚜왈렛이 와 버렸다. 그래서 오늘은 일찍 일을 마치고 드라마를 보고 있다. 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