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운의 하루다.

파리의 안나 78

by Anna

불운의 하루다. 아침을 먹고 머리를 감는데 머리의 물기를 짜내는 과정에서 갈라져 있던 오른손 검지 손톱 사이로 머리카락이 끼여 순간적으로 뜯어졌다. 피가 뚝뚝 흘렀다. 손톱은 거의 다 뜯긴 상태였다. 우선 피를 짜 내고 물로 헹군 뒤 물기가 떨어지는 머리를 대충 감싸고 할아버지께 소독약이 있냐고 여쭈었다. 뿌리는 약을 주셔서 간단히 응급처치를 하고 아픈 상황을 가족들에게 알린 뒤 반창고로 감았다.


다시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까는 너무 놀라 심하게 아프진 않았는데 그 상황을 다시 떠올리니 끔찍했다. 며칠 전부터 손톱이 갈라져서 안 그래도 불안했는데 제대로 신경 쓰지 않은 내 잘못이었다. 하도 좋은 일만 줄줄이 생기니 나에게 닥친 작은 시련이고 불행이라 생각하고 참아냈다. 이 정도 액땜은 참아낼 수 있다. 아무튼 손톱 때문에 잠깐 멘붕이 와서 준비가 늦어졌다.


예정 시간보다 조금 늦게 집을 나서 바스티유 시장에 갔다. 냉장고 바지를 사려고 했는데 가을이 와서 그런지 레깅스밖에 없었다. 복잡한 시장을 헤치고 헤쳐 결국 냉장고 바지는 못 사고 민박집에 가져갈 멜론을 샀다. 2개에 3유로였다. 꽤 무거운 멜론을 들고 한 달 반 만에 낭테르에 갔다. 오랜만에 RER을 타니 좀 지루했다. 날씨가 좋았다. 민박집에 도착하니 한창 청소 중이었다. 사장님은 날 기억하지 못하셨다. 나는 본인의 중대한 비밀도 알고 있는데. 정말 알수록 별로인 사람이다.


주리 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 빨래방에 가서 빨래도 가져오고 본의 아니게 일을 도왔다. 사장님이 카레와 돈가스를 해주셔서 먹고 후식으로 내가 사 온 멜론과 집에 있던 망고, 복숭아를 먹었다. 일요일은 이모가 쉬는 날이라서 일이 많았다. 장을 보러 가신다고 하셔서 그냥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주리 언니는 괜히 놀라오라고 해놓고 일만 시켰다고 미안하다고 하셨다. 다음 주에는 시내에서 만나기로 했다.


집으로 가는 길 2.65짜리 티켓을 끊어놓고 샤를드골 에뚜왈 역에서 멍 때리다가 그냥 출구로 나가버렸다. 환승 통로를 찾다 보니 그곳은 이미 출구였다. 황당함에 잠시 출구 앞에 서 있다가 지갑에 있던 까르네 한 장을 꺼내서 다시 들어갔다. 결국 돈 날리고 표 날리고 참 잘하는 짓이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물론 다 내 잘못이지만 조금 짜증이 났던 건 사실이다. 그래도 큰 사고 없이 자잘한 사건이 생겼던 것뿐이니까 더 힘을 내야겠다. 벌써 또 한주가 지났다. 9월도 반이나 흘렀다. 시간 참 잘 간다. 더 잘 살아야지.

keyword
이전 12화퀵 보드 라이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