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85
늦잠의 꿈은 산산이 부서졌다. 뚜왈렛이 8시가 되기도 전에 온 것이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일을 돕고 아침은 간단히 사과만 먹었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가 밀린 웹툰을 보고 혼자 망상을 하며 오전 시간이 그렇게 다 가버렸다. 오늘은 외출을 꼭 하리라는 마음으로 점심 먹기 전 화장을 하고 옷까지 갈아입었다.
할아버지께서 성당에서 조금 늦게 오셔서 식사시간이 늦어지는 바람에 오후 1시 30분 정도에 밥을 다 먹었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밖에 나가려고 하자마자 장대비라니. 금방 그치겠지 싶어 무한도전을 보다가 2시쯤 집을 나섰다. 유럽 문화유산의 날 기념으로 피카소 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한다고 하여 가볼 심산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15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겨우 도착한 시청에는 대형 스크린을 설치해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추고 있었고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 목표는 피카소였기 때문에 생 폴 역으로 가야 했다. 가는 길에 늘 그렇듯 구제 숍을 잠깐 들렸다. 일요일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많았다. 미리 캡처해 둔 구글 지도를 보며 피카소 박물관을 찾아갔다. 줄을 섰지만 금방 입장했다. 가방 검사를 마치고 내부로 들어서니 안내 책사를 받는 사람들과 관람을 하러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난 어차피 책자를 받아도 글을 못 읽기 때문에 바로 관람을 하러 들어갔다. 그런데 박물관 내부에는 그림이 없었다. 딱 한 점의 작품을 보았는데 그것마저도 유명하지 않은 작품이라 그냥 사진만 찍고 지나쳤다. 알고 보니 오늘은 공사가 완료된 박물관 내부의 구조만 구경하는 자리였다. 결국 그 큰 박물관 안을 이리저리 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원을 둘러본 뒤 허무하게 나왔다. 하긴, 그림을 공짜로 보여줄 리가 없지. 결국 속이 타는 마음에 아이스크림이나 먹자 싶어 아모리노에 갔다.
오늘은 피스타치오, 티라미수, 망고 맛을 먹었는데 역시나 특별히 맛있지는 않았다. 이제 다시는 아모리노에 안 갈 거다. 집에 가는 70번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가기 위해 시청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어디선가 시위대 비슷한 사람들의 무리가 떠내려 왔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뭐 자연환경을 보존하자, 방사능 발전을 막자는 취지의 행진인 것 같았다. 그 사람들을 뚫고 힘들게 정류장으로 갔는데 대기 시간이 무려 60분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짜증이 나서 결국 지하철역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지하철에도 사람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자동문이 닫히기 전 겨우 탔는데 문이 닫히는 순간 몸을 욱여넣은 아저씨의 팔 털에 얼굴이 쓸려서 기분이 더러웠다. 힘겹게 집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4층이었다. 설마 뚜왈렛이 벌써 왔나 싶어 초조하게 기다리는데 내려온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가족들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들어가 쉬었다. 금방 뚜왈렛이 와서 후다닥 돕고 다시 방에 콕 틀어박혀 있다가 늦기 전에 샤워를 했다. 그래도 다행히 밖에서 비는 안 맞았네.
저녁엔 왠지 고기를 먹고 싶었는데 언니는 국수를 했다. 그럭저럭 배를 채우고 진짜사나이를 봤다. 어릴 때 아빠가 여군에 가라고 장난 식으로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난 절대 못할 것 같다. 물론 군기 잡고 가오 잡는 건 잘할 자신이 있지만 체력이 문제일 것 같다. 아무튼 재밌게 잘 봤다. 이제 곧 저녁 뚜왈렛이 오겠지. 그동안 ‘비긴 어게인’을 볼 예정이다. 내일 아침엔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