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고마비

파리의 안나 86

by Anna

진짜 늦잠을 잤다. 휴대폰을 충전기에 꽂아놓고 잤는데 알고 보니 콘센트가 빠져있는 상태였다. 결국 여덟 시 알람이 울리지 않았고 정신은 들었지만 계속 잤다. 한참 뒤 겨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나가니 아홉 시 반이었다. 다행히 뚜왈렛은 오지 않은 상태였고 비몽사몽으로 선생님 양치를 해 드렸다. 어떤 날은 물을 잘 뱉으시는데 어떤 날은 입에 물을 머금고 꿈쩍도 안 하신다. 곧 간호조무사가 왔고 내가 옆에서 계속 보채니 뱉어내긴 하셨다. 헥헥 거리는 거대한 간호조무사와 아침 임무수행을 끝마치고 늦은 식사를 했다.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려는데 푹 자서 그런지 쌍꺼풀이 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화장도 공 들여하니 예뻐 보였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머리를 말리니 예쁨은 사라졌다. 뿌리가 너무 거슬린다. 여기서 뿌리 염색을 할 것인가, 검은색으로 염색을 해버릴 것인가, 그냥 이대로 살 것인가. 고민이다.


두시쯤 운동을 위해 오랜만에 퀵 보드를 타고 나갔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후리스를 챙겨 입고 나오길 잘한 것 같다. 그래도 가끔 해가 비춰서 더울 때도 있었다. 앙발리드를 지나 알렉산더 3세 다리 옆 버스 정류장에서 가방에 옷을 넣으려고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났다. 바로 앞이 차도였는데 술에 취한 젊은이들이 창문을 열고 음악을 크게 튼 상태로 춤을 춰대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남자가 나를 보며 팔을 위로 바운스 했다. 나도 웃으며 몸을 흔들어줬다.


신호가 바뀌고 그들은 신나게 앞으로 달렸고 나도 반대 방향으로 떠났다. 알마 다리 쪽으로 가는 길에 한 부부가 길을 물어보았다. 63번 버스가 어디 있냐고 물었는데 방금까지 내가 앉아있던 정류장이었다. 그런데 설명하기가 힘들어 그냥 죄송하다고 했고 그들은 괜찮다고 고맙다고 말했다. 후에 집에 돌아갈 때 그 버스정류장을 다시 지났는데 그곳에 그들이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맞게 찾아가서 다행이다.

아무튼 나는 알마 다리 밑으로 내려가 예전부터 소원했던 그물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이음새가 딱딱했다. 게다가 내가 눕자 그 많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겠지 하며 사진을 찍는데 뿌리 때문인지 어떻게 찍어도 안 예뻐 보였다. 그냥 발 사진이나 찍자 하고 눈앞의 풍경을 담았다. 한참을 누워 있다가 전신이 지압되는 느낌에 일어나 다시 앙발리드로 향했다. 가을이 되자 낙엽들이 바닥에 떨어져서 퀵 보드를 타기가 좀 안 좋아졌다. 내 씽씽이는 아이들 용이라서 튼튼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걸려 넘어지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거의 끌고 다녔다.


집에 일찍 들어가기가 싫어 항상 지나쳐왔던 공원에 들어가 쉬었다. 그런데 공원에서도 마찬가지로 내가 벤치에 앉자 사람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오늘 왜 이래? 잠시 사색에 잠기다가 비둘기 한 마리가 내 곁으로 오기에 아까 그물침대 밑에서 주웠던 과자를 쪼개 던져주었다. 그런데 어떻게 안 건지 여기저기서 비둘기들이 날아왔다. 식겁해서 저 멀리 과자를 던졌는데 그래도 여전히 내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어느 순간 열 마리 정도 모인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빠져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무언가 먹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건 없었다. 마트에 들를까 말까 고민하다 내 뱃살을 보고 참자는 생각에 집으로 갔는데 마침 뚜왈렛이 와 있었다. 내가 급히 도우려고 하자 우선 겉옷부터 벗으라며 친절히 날 기다려주었다. 그런데 기저귀가 깨끗했다. 결국 갈지 않고 닦기만 했다. 외출 후 잠시 불어 공부를 조금 하고 인터넷 서핑을 즐겼다. 저녁은 카레였다. 족발이 먹고 싶은 날이다. 지금 한국에 돌아가면 먹고 싶은 음식들이 아주 한 가득이다. 그전에 살부터 빼야겠지. 가을은 천고마비의 계절이라더니 나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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