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안나 88
눈은 잘 안 떠졌지만 그래도 조금 일찍 일어났다. 정신을 못 차리다 아홉 시쯤 할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고, 이후 뚜왈렛을 했다. 배가 아파 화장실에 가고 싶었는데 하필이면 아침부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 많은 아줌마가 와서 고생이었다. 스트레스받으며 일을 돕다 겨우 끝마치고 볼일을 봤다. 왠지 오랜만에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려다 귀찮아서 베이스만 했다.
점심에는 할아버지와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사 오기로 해서 옷을 다 갈아입고 기다리고 있는데, 일이 있어 외출하셨던 할아버지가 본인이 그냥 사 오겠다고 하셔서 안 나갔다. 배불리 빅맥 세트를 먹고 가방을 챙겨 산책을 나갔다. 오늘은 퀵 보드 없이 걷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나오자마자 좀 추워서 다시 겉옷을 가지러 들어갔다. 니트에 후리스를 걸치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비가 오더니 날이 많이 추워졌다. 매일 씽씽 달리며 스쳐 지나가기만 했던 풍경들을 곱씹으며 걸었다. 앙발리드를 지나 알렉산더 3세 다리 밑으로 내려가 알마 다리 쪽으로 걸었다. 며칠 전만 해도 없었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오늘은 딱딱한 그물침대 말고 딱딱한 의자에 누워서 쉬었다. 눈앞에 유람선들이 지나가며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조금 나른한 기분이 들어 조금 자려고 했는데 구름에 해가 가려지자 금세 추워져서 일어났다.
다시 다리를 건너 샹젤리제 쪽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에 개선문을 볼 겸 샹젤리제 거리를 걸었다. 역시나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시선이 많이 느껴졌다. 왜 쳐다보는 거지. 라뒤레를 지나며 마카롱을 몇 개만 살까, 고민하다 말았다. 매일 눈으로만 보던 루이뷔통 본점 사진을 찍고 개선문을 바라본 뒤 다시 앙발리드로 향했다.
그런데 시간을 보니 벌써 4시 10분이 지나고 있었고 오랜만에 걸었더니 다리가 아파 집까지 걸어가기는 무리일 것 같았다. 결국 앙발리드 역에서 지하철을 탔다. 집에 도착하니 5시가 조금 안 된 시간.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미 뚜왈렛은 왔다 간 뒤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쉬면서 천천히 걸어 올 걸. 할아버지께서 카톡을 보내셨다고 하는데 이미 지하철에 탄 뒤라 늦게 확인이 되었다.
그래서 오자마자 샤워를 했다. 오늘 이상하게 온 몸이 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긁어댔는데 건조해서 그런 건지 알레르기가 생긴 건지 찝찝해서 깨끗이 씻었다. 그리곤 프랑스 존을 눈팅하다 책 5권을 5유로에 파는 분을 발견하여 문자를 보냈다. 이번 기회에 한글 책도 저렴하게 사고 좋지 뭐. 다행히 내가 원하는 책들을 구입 가능했다. 내일 오후에 ‘convention’ 역에 가서 사 올 예정이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데. 몸만 살찌우지 말고 마음의 양식도 가득 채워줘야지. 저녁을 먹고 후식으론 밤을 삶아 먹었다. 오랜만에 먹으니 맛있었다. 파리에서 밤을 삶아 먹다니. 진정한 가을 분위기가 났다. 이후 불어 공부를 조금 하고,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그것이 알고 싶다 최근 편을 보았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한 3명의 남자 이야기였다. 그것이 알고 싶다는 정말 볼 때마다 화가 나고 무서운 것 같다. 모두 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일어난 일들이니. 아무튼 재심을 꼭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 때는 나도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물론 성적 때문에 포기했지만. 지금 저녁 11시가 다 돼간다. 이상하게 저녁 뚜왈렛이 안 온다. 졸려 죽겠구먼. 밤마다 오는 흑인 아줌마는 엉덩이가 정말 크다. 그리고 정말 싸가지가 없다. 빨리 끝내고 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