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은 무섭다.

파리의 안나 87

by Anna

화요일은 아침 시간이 바쁘다. 선생님의 머리를 감겨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친절한 간호조무사가 와서 다행이었다. 민향 언니가 몸이 안 좋다는 핑계로 어학원에 가지 않아 아침은 편히 먹을 수 있었다. 잠은 덜 깼지만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오전에는 청소를 했다. 청소기로 한 번 밀고 물티슈로 걸레질 한 번하면 끝이다. 마리아 아줌마가 와서 청소를 해 주시지만 내 방은 내가 하는 게 속 편하다. 누군가에게 방 청소를 맡긴다는 건 아직까지 어색한 일이다.


점심엔 잡채를 먹었다. 기대를 안 했는데 정말 맛있었다. 그리고 외출을 할까 했지만 어쩐지 몸 상태도 별로고 기분도 별로라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방에 틀어박혀서 인터넷을 끄적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영화 ‘괴물’에 대한 포스팅을 읽고 다시 한번 보고 싶어 져서 다시 보기 사이트에 들어갔다. 2006년 작이라니. 벌써 8년이란 시간이 흘렀구나. 내가 극장에서 괴물을 본 나이가 15살, 중학교 2학년 때라는 거다. 세월 참 빠르다. 영화를 재생하니 영어 자막이 안 나와서 의아했지만 어차피 아는 내용이라 넘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이후 분명 한국 사람들과의 대화로 기억되는 장면에서 계속 중국어가 나왔다. 알고 보니 중국어 더빙 판이었다.


어이가 없어서 다른 영상을 재생하니 이번엔 영어부분은 자막도 나오고, 한국어 버전이 맞았다. 내용도 다 알고 해석도 많이 읽었는데 다시 보니 새로운 부분도 있었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마지막에 괴물이 불에 타 죽는 장면에서 불 CG는 매우 티가 났지만, 그때의 기술력으로는 굉장한 수준이었다고 생각한다. 저번에 알렉스를 만났을 때 영화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해놓고 그가 추가적으로 어떤 영화를 가장 좋아하냐는 질문을 했을 때 당황했던 기억이 났다.


단순히 스릴러나 실화 모티브의 공포 영화가 좋다고 말했을 뿐, 어떤 영화가 딱 떠오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오늘 깨달았다. 아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봉준호 감독의 이 ‘괴물’이고, 가장 만들고 싶은 영화도 이런 장르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나는 현실 불가능한 스토리는 싫다. 현실적이면서 비현실적인 영화 괴물이 딱 마음에 든다. 이제 앞으로 그 누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괴물’이라고 대답하련다. 영화를 다 보고 밀린 빨래도 돌렸다.


외출도 자주 하지 않는데 무슨 옷이 일주일 만에 이렇게 쌓이는지. 아마 프랑스 세탁기가 작아서 더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수도 있다. 저녁도 배불리 먹고 금방 이를 닦았다. 생각해보니 불어 공부를 하지 않아서 급하게 단어장을 펴고 마리 쌤을 찾아갔다. 그리고 다시 찾아온 자유의 시간. 오후 내내 끄적거린 인터넷상에는 더 이상 내가 볼 새로운 정보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작년 겨울 혼자 떠났던 내일로 여행이 생각났다.


여행을 다녀와서 한참 뒤에나 정리했던 여행기 ‘되새기다’를 다운로드하였다. 다행히 N드라이브 속에 사진과 함께 보관되어 있었다. 다운로드를 하고 천천히 읽어보는데 글씨체가 적용이 되지 않아서 문단이 다 틀어져 있는 상태였다. 내가 또 그런 건 못 참는 성격이라 벌써부터 똥이 된 노트북이 렉을 먹고 중간중간 꺼지는 한이 있어도 다 고쳐 내리라, 하고 수정 작업에 들어갔다. 글씨체와 글씨 크기는 조절하고 사진 위치를 다시 맞추면서 내가 보고, 느끼고, 생각했던 7일간의 기억들을 다시 꺼내어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처음 홀로 떠나는 여행에 짧지도 길지도 않은 일주일간 정말 행복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렇게 오고 싶었던, 꿈에 그리던 프랑스 파리에 와 있는데 정말 행복한지 묻고 싶어졌다. 무려 프랑스 파리에서 살고 있는 지금, 나는 벌써부터 이 환경에 익숙해져 버린 걸까?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익숙함은 무섭다. 우연히 꺼내어 본 작년 겨울의 추억을 통해 지금 내 자신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나태해지지 말자. 익숙함은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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