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은총의 하루

'사랑의 딸회' 수녀원으로 가던 날

by 혜솔

말따 수녀님!

한국에 있을 때에도 자주 뵙기가 어려웠던 수녀님을 파리에서 만날 생각을 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했습니다.

오래전 함께 다니던 본당 생각도 나고 아이들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 보내던 생각도 나고 또 그 본당을 떠나던 때도 생각이 나서 잠시 울컥했어요.

'사랑의 딸회' 모원으로 가는 길, 성지를 향해 걷는 숭고한 마음으로 수녀원 앞에 섰을 때 문을 열고 나오시는 수녀님을 보았어요. 아, 그 순간의 반가움이란...

공항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서도 실감이 나질 않았어요. 지하철을 갈아타고 바빌론 역에 내려서 많은 인파 속을 헤집고 걸을 때에야 세상은 참 넓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동유럽의 프라하에 살고 있는 것도, 수녀님이 파리로 연수를 와 계신 것도, 오늘 우리가 기적의 메달 성당(Chapelle de Médaille Miraculeuse)에서 반갑게 만나게 된 것도 다 하느님께선 알고 계시는 일일 거라 생각하니 신비스럽기까지 했죠.

성모 발현지가 파리에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하셨지요? 저도 몰랐답니다. 그것도 파리의 중심가 최초의 백화점 봉마르쉐(Le Bon Marche) 뒤편에 위치한 기적의 메달 성당(Medaille miraculeuse)이 성모발현지라는 것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제가 다녀온 포르투갈 파티마의 성모발현보다 110년이나 먼저 발현하신 곳이 이곳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수녀님의 설명이 짧고 굵게 가슴에 와닿았나 봐요.

잠시 수녀님께서 하던 일 마치고 나올 때까지 성당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으라고 하시곤 수녀원으로 들어가셨죠. 그때 저는 제대 앞에 앉아서 무슨 기도를 했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요. 세계 평화를 위해서였을까요?


아, 라면 생각이 나네요.

파리에서, 수녀님이 끓여주신 라면을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던 일인데 얼마나 맛있던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가능한 일이었을까 싶기도 해요. 더구나 수녀님과 함께 연수받으시는 세계 각국에서 오신 수녀님이 얼마나 많았던가요. 오후에 그분들과 함께 생 마르틴 성당을 향해 걸을 때에는 정말 축복받은 주일을 보내고 있다는 뿌듯함이 밀려오기도 했답니다. 주변 성당 순례를 마친 후 생 쉴피스 성당에서 주일 저녁 미사를 드린 후 헤어져야 했지만 나의 긴 여행에 수녀님께서 동반해 주신 것 같아 감사했습니다. 그래서 수녀님과 헤어진 후 숙소를 향한 제 발걸음은 묵주기도 한 꾸러미로 마음이 충만했답니다.


밤새 안녕하신지요?

흐릿한 날씨에 아랑곳없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걷다 보니 세느강변이었고 그중 어느 다리를 건너다가 생 루이 섬으로 내려갔습니다. 물가를 따라 걸으면서 고니도 만났고 물오리들이 자맥질하는 것을 가만히 앉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냥 여유로운 한 나절을 보내볼까 하는 마음으로 강변을 따라 걷기 시작했어요. 유람선이 지나가고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그 광경을 웃으며 바라보다가 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오후가 되자 화창해진 날씨 덕에 파리의 가을을 한 몸에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가방에서 엽서 몇 장을 꺼내고 짧은 안부를 적고 있습니다.

아들에게, 대녀에게, 그리고 어느 시인에게... 보내는 엽서마다 파리의 오후가 내려앉습니다.

어느 곳으로든 더 가지 않아도 좋을 만큼 행복한 시간이 되어가는 느낌.

그냥 이대로 하루를 흘려보내기로 합니다. 가방에서 샌드위치를 꺼내고 캔 음료를 꺼내 마시면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봅니다.

10여 년 전에 다녀갔던 파리의 봄이 생각납니다. 비 개인 오후의 몽마르트르 언덕엔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요. 그림 그리는 사람들 사이로 걸으며 구경하는 재미가 좋았습니다. 사크레퀘르 성당 아래 계단에 앉아서 뮤지션들의 버스킹 공연을 보기도 했던 그 봄이 이 가을을 스치고 갑니다. 파리 시내를 하루 종일 걸어 다녔던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은 그냥, 이대로 강가에 앉아 지내려 합니다. 생각나는 사람들에게 안부를 전하면서... 프라하로 돌아갈까, 파리에 남아 있을까 고민하는 오늘 하루도 저에겐 커다란 은총이겠죠?


https://youtu.be/rxM-ryFKv3I?si=fMOatd-FZHploxXH



몇 해가 지나서야 이 편지를 보내는 지금 수녀님은 기적의 메달 성당에 계시겠지요?

연수가 끝나고 그곳 수녀원으로 아주 들어가신다고 말씀해주셔서 그런 줄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른 만큼 그때 그 시간이 더욱 소중하고 그리워집니다. 아마도 제게 그런 시간이 점점 줄고 있어서 일 거라는 생각 때문 인 것 같아요. 건강하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S. 안나-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