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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르미 Feb 01. 2024

채식주의자 없는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읽고 나누기







아무도 자신을 인간으로 존중해주지 않아서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래서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존재하려하는 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




사진 : <채식주의자> 저자 한강, 출판 창비, 2022.03.28. 발행




<채식주의자>는 2016년 인터내셔널 부커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책이다.

지금의 나와 우리가 인간답게 잘 살아있는지를 돌이켜보게 만드는 역작이다.



주인공 영혜는 어렸을 적 아버지에게 맞고, 맞는 것을 가족들로부터 방관당하면서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며 자라온다. ‘자신에게 관여를 하지도 않고, 자신이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점이 좋았다’는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도 주체로서 존중받았을 리 없다.


사랑하는 사람이 고기를 못 먹는 것은 차치하고 이상한 꿈 때문에 수개월 잠 못 이루고, 날로 여위어간다면 이유가 궁금해질 것이다. 무엇보다 고생하는 것이 못내 가슴 아프고 염려되는 마음에, 왜 그런 꿈을 꾸는지 싸워도 보고, 화도 내보고, 병원도 데려가면서 적극적인 조치를 취할 법 하다. 하지만 영혜의 남편은 영혜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깊이 알거나 관여하려 들지 않는다. 그저 방치하다가 본인 삶에 폐를 끼치자 그때서야 친정에 알리는 방식으로 조치를 취한다.


때리던 아빠, 각자 살 길을 찾으며 숨죽이던 가족들, 남편, 그리고 그런 삶을 그냥, 살아낸 영혜 자신이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수없이 죽이고, 죽이는 것을 방관해온 것이다.



그렇게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죽어있는 삶을 살던 영혜는 아버지가 강아지를 죽이는 모습을 보고, 그것을 먹으면서 인간이라는 동물의 동물(짐승)적인 모습, 본인 내면의 폭력성을 자각한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치게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부엌의 칼을 내심, 두려워한다.


그 후 남편의 삶속에 붙어있는 부속물처럼, 가정부처럼 여느 날을 보내다 일순간 도마 위의 칼이 밀리듯, 주위의 모든 것들이 밀려나간다. 그리고 꿈을 꾸기 시작한다. 사람을 죽이고 동물을 죽여서 맛있게 먹는 피 웅덩이에 비친 짐승같은, 괴물같은, 인간답지 않은, 자신의 얼굴을.


영혜는 마지막 남은 인간성을 붙든채 인간으로서의 본인을 상실하고 짐승이 되는 것을 거부하며 처절하게, 고기먹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이 영혜의 삶에 깊이 관여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채식주의자로 비추어진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채식주의자’ 라는 제목 자체가 아무도 이해하려들지 않는 삶, 관여해주지 않는 고립된 삶, 인간으로서, 주체로서 존중받지 못하는 영혜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영혜를 채식주의자라 칭한다. 하지만 영혜는 단 한번도 본인을 채식주의자라 칭한 적이 없다. 그저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단호하게 말했을 뿐이다.


영혜는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채식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고기먹기를 지양하는 것일 뿐이다. 꿈속의 날고기를 씹어 먹던 짐승이, 그 얼굴이 자신이었다는 두려움 가운데, 그런 짐승이 되기를 처절하게 거부하는 와중인 것이다.


그래서 ‘저는 고기 안 먹어요.’ 라는 영혜의 말이 ‘저는 고기를 먹던 꿈속의 그 얼굴, 그 짐승, 그 괴물이 아니에요’ 라는 말처럼 들렸고, 고기를 먹지 않는 것 너머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리려는 노력조차 해주지 않는 상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책의 제목, <채식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무도 인간으로서 대해주지 않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자신을, 인간이라는 일말의 자각으로 간신히 붙들고 있는 영혜의 입에, 아버지는 사정없이 고기를 밀어 넣는다. 그 후 자살을 시도하는 영혜의 모습이 마치 ‘나는 이제 인간으로서의 나를 상실해버렸다’, ‘나는 이제 그 짐승이 되어버렸다’ 울부짖으며 인간으로서의 나를 죽이는 동시에 인간으로서, 죽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후 1장 말미에 “...그러면 안돼?” 라며 뜯어먹은 동박새가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장면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존재의식, 인간으로서의 자각을 놓아버리고, 겉은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영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사진: Unsplash의Melanie Wasser





우리는 인간답게 살고있나


사진 : 늑대무리 속에서 양육되다 구출된 인도소년 디나(Dina Sanichar)


나는 영혜가 꾸는 꿈이 ‘무언가로 존재하려는 욕구의 분출’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무리 속에서 살아온 인도소년 디나는 평생 늑대의 생활양식을 버리지 못했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사회, 환경이 그 사람을 인간으로 대해주고 존중해주어 스스로를 인간이라는 존재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영혜는 오랜 기간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 영혜가 끝내는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여도 좋으니, 어떤 존재로서, 유의미하게 실존하는 자신의 모습을 자꾸만 꿈꾸게 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혜가 인간도 무엇도 아닌 존재라는 점에서 성적매력을 느꼈던 형부, 그런 형부로 하여금 온몸에 꽃이 그려지고, 식물로서 교합하고, 식물로 존재하는 길을 택하기 시작하면서 영혜는 더 이상 그런 꿈을 꾸지 않게 된다. 인간이 아닌, 낯익지만 낯선, 꿈속의 얼굴을 “이제 무섭지 않아요.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라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영혜는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기에 식물로 존재하기를 택하고, 완전한 식물이 되어간다.


영혜의 경우 극단으로 치달은 사례이긴 하지만, 영혜처럼 인간으로서 존중과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잘 존재하지 못해 무너져내리는 일이 자주 일어나곤 하지 않나.


물건 값을 계산해주는 기계 대하듯,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나,

눈인사는 하고 지냈나,

크고 작은 일상 속에서 나는 얼마나 사람들을 인간으로 대우하면서 살아왔는가를 돌이켜보며, 부디 내가 수많은 '영혜'를 만드는데 일조하지 않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나는 잘 살아있나           


         

마음속으로 죽음을 체험함으로써, 다시 말해 자신을 극단적으로 죽음을 향해 기투함으로써, 죽음의 완전한 실존론적 가능성을 비로소 자기의 가능성으로 받아들여 견디어 내는 것이다…죽음에로의 선구란, 가장 독자적이고 가장 극단적 존재 가능을 이해할 가능성이다. 탄생과 죽음 사이에 있는 일상적 현존재는, 죽음에로의 선구를 통해, 세인-자기로부터 벗어날뿐더러 현존재의 가능한 전체 존재를 확보함으로써 자신의 본래적 가능성 앞에 직면할 단서를 마련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죽음에 이르는 본래적 존재 : 선구 [先驅, Vorlaufen, Anticipation]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해제), 2004., 이선일)


영혜의 형부와 언니는 영혜의 모습을 보면서 하이데거가 말했던 ‘죽음에로의 선구' 를 한다.


형부는 스스로의 목숨을 쓰레기처럼 내던져버리려 했던 영혜를 보면서 일순간 무척이나 지치고, 버텨온 삶이 넌더리나고, 본인의 삶을 담아온 모든 것들이 견딜 수 없어진다. 십 여년 간의 작업이 그가 알았던, 혹은 안다고 믿었던 어떤 사람의 것이 되어버린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대로 그렇게, 그런 식으로 앞으로를 살아갈 것이라는 생각에 깊은 슬럼프에 빠진다.


성실을 천성으로 여기며 인내로 꽁꽁 뭉쳐진 삶을 살아온 언니도 하혈을 하는 자기 모습과 자살을 시도하던 영혜의 모습을 겹쳐보며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단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음을, 다만 견뎌왔을 뿐임을 자각한다. 그래서 살 시간이 기한 없이 남아있음을 알고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는다.


형부도, 언니도, 영혜를 통해서 죽음을 간접 체험한 뒤 내가 없이 죽어있던 삶을 자각한다. 그리고 그런 삶에 회의를 느껴 슬럼프에 빠지거나, 자살을 시도하려 산에 오른다. 앞으로도 그런 존재로, 그런 식으로, 견디는 삶을 살아야한다는 사실이 절망스러워진 것이다.


자살하러 올라간 산길의 끝에서 언니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지 못한다.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으로 버티고 서 있는 나무들,

박명 속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로부터 무서우리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을 듣는다.


그것이 부디 생명의 말이었기를,

언니는 앞으로 인간으로서, 나로서, 잘 존재하는 삶을 살기를,

그런 결말이기를 바라면서 책을 덮었다.


사진: Unsplash의todd kent



내 삶에 내가 잘, 살아있나?

‘그렇다’고 명쾌하게 답할 수 없어서 새로운 삶을 찾아나서게 된 것 같다.


당신은 어떠한가? 인간답게, 당신답게 잘, 살아 있나?


당신다운 삶을 응원하고
당신답지 못했던 순간을 위로하고 싶다.  



오늘도 화이팅 :)





https://campaigns.do/discussions/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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