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사람들

8월 2일 새벽 4시

by 안나

축구에 열광하지만 그렇지 않는 척 하는 독일 남자들에게 다행히 욕은 먹지 않았다. 식은땀을 식히고 있자니 야스민이 자리로 돌아오면서 고실고실한 내 머리를 어린 아이 머리칼을 쓰다듬듯이 쓱쓱 만져주고(!) 내 옆에 앉는다. 아아... 강아지의 마음을 알겠다. 야스민은 영어를 거의 못하고 나는 독일어를 아예 못하지만 같은 나이의 우리들은 처음부터 오래 알던 사이처럼 반갑게 인사했고 몇 마디 나누지 않았지만 인사 몇 번 만으로도 금세 친해졌다. 야스민은 나와 같은 35살. 15살 된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는 싱글맘이다. 너무 어려 보여서 아들이 5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15살이라고 하여 깜짝 놀랐다. 본인도 어린 나이에 임신을 해서 이런저런 어려운 일을 많이 겪었던 탓인지, 지금은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어린 엄마들이 무사히 출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라기에 그런가보다 했는데 이 설명을 듣는 순간 그녀에 대한 존경심이 더 커져버렸다.


KakaoTalk_20190821_152923565.jpg WIFI 를 누군가 WIFE로 살짝 바꿔놓은 흔적을 발견했다


크리스와 함께 맥주를 사들고 온 레나 역시 쉽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멋지고 당찬 여자였다. 그날 파티에 모인 사람 중에 가장 어린 그녀답게 새벽까지 놀고 아침에 클럽에 가자고 하여 모두 할 말을 잃게 만들 지경이었다. 안돼, 레나. 너야 아직 한참 젊으니까(서른 살이다) 그럴 힘이 남아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늙고 지치고 취했어. 잠시 후 술이 거나하게 취한 레나는 나를 붙잡고 생뚱맞은 이야기를 꺼냈다.


“안나, 제발 부탁인데 우리 독일 사람들을 나치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뭐라고? 내가 그렇게 생각했으면 애초에 여기 오지도 않았어. 아니 지금 무슨 말을 하는거야!”


“제발, 제발 부탁이야. 우리를 나치라고 생각하지 말아줘...”


“아니 그렇게 생각 안한다니까?”


레나의 간절한 목소리에 당황했지만 너무 웃겨서 한참 웃었다. 비록 베를린 사람들이 독일에서 싸가지 없기로 유명하다지만 나는 이렇게 친절하고 유쾌하고 다정하면서도 독특하고 또 똑똑한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들 역시 나와 다르지 않았다. IT 업계에서 일한다는 크리스토퍼와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누구보다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까 돌아가며 한 문장 씩 말하는 게임을 했을 때였다. 그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형제, 자매를 먼저 떠나보낸 적이 있다.”


질문을 던진 그 말고는 아무도 맥주를 마시지 않았다. 남동생이 몇 해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갑자기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을 보니 기일이 가까워진 것이 아닐까 추측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그에게 아무 것도 물어보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그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었다. 거기에 모인 사람 중에 어쩌면 나만이 유일했을지도 모른다. 그저 그의 동생을 위해 함께 건배했다. 슬픔은 쉽게 잦아들지 않겠지만 시간과 사람들이 견딜 수 있게 도와줄 거야.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크리스토퍼 본인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


오늘 파티의 호스트인 루드빅은 생각보다 맥주를 많이 마셨는지 술이 약한 건지 어느 순간 피곤함을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보통 이런 경우에 얼굴에 낙서를 하거나 눈썹에 치약을 바른다는 나의 말에 막스가 갑자기 펜을 찾기 시작했다. 내 말소리를 들은 루드빅이 번쩍 눈을 떴다.


“아냐, 나 안 잤어!”


이러고 또 잔다. 루드빅은 베를린에서 영화 음악 관련 전공을 하고 지금은 레코딩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그와는 며칠 전 단트라에서 독일 출신의 영화 음악 디렉터, 한스 짐머 이야기를 하며 친해졌다. 작년에 한국에서 한 밴드가 와서 앨범 녹음을 하고 갔다는데 내게 한국 문화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으니 물어봐도 되냐고 했다. 물론이지.


“그 밴드 멤버들이 그러는데, 한국에서는 나이가 되게 중요한가봐? 같은 해에 태어났어도 어떤 남자애가 다른 애보다 생일이 한 달 빠른거야. 그러면 형이라고 불러야 하고 뭐 시키는 대로 다 해야 한다는데 그게 보통 한국의 문화야?”


“뭐? 아...진짜.”


순간 너무 쪽팔려서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또 어린 꼰대들이 유럽 가서 이상한 소리하고 왔구만. 밴드는 무슨 놈의 밴드야. 요즘 누가 촌스럽게 나이 따지면서 논단 말인가. 그것도 베를린에 일하러 가서 만난 사람한테.


“한국 문화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을 대접해주긴 하지만 일단 대학교 졸업하고 사회로 나가면 나이는 서로 물어보지 않아. 나도 당연히 처음 만난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고. 내가 말하고 싶으면 말하지만. 아니 근데 걔네는 고작 서른 살 밖에 안 된 애들이 왜 그런 소리를 했지?”


“심각한 건 아니고 자기들끼리 장난치면서 그런 말을 하더라고. 녹음 끝나고 같이 술 마시러 갔는데 되게 재밌는 애들이었어.”


“아휴... 부끄럽다.”


그리고 요전 날 강아지 얘기로 실연의 상처를 건드린 것 같아 오늘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조심해야지, 다짐했는데 그런 다짐이 무색하게 또 전여친과의 추억을 헤집어 버렸다. 이건 정말 의도하지 않았다. 벽걸이 TV 거치대가 TV보다 훨씬 크게 삐죽 튀어나와 있기에 별 생각 없이 쳐다보고 있었더니 루드빅이 갑자기 설명을 했다.


“원래 큰 TV가 있었는데, 어... 여자 친구가 이사 나가면서 가져갔어. 나는 작은 TV를 하나 얻어서 쓰고 있는거야.”


나는 차마 그의 눈을 쳐다보지 못하고 내 앞의 맥주잔을 들었다. 자 건배하자. 뭐라 할 말은 없지만 너랑 술은 같이 마셔줄 수 있어. 멀쩡해 보이려고 노력하던 루드빅이 다시 스스르 눈을 감는다. 야스민과 크리스토퍼는 3시 쯤 집으로 돌아갔고, 크리스와 레나는 자신들만의 시간을 만끽하고 있다. 그리하여 나는 막스에게 아까부터 너무 궁금했지만 너무 촌스러워 보일까봐 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저기... 아까 남자랑 키스해본 적 있다고 했잖아. 근데 너 게이는 아닌 것 같던데.”


“응 아니지.”


“어쩌다가 그렇게 된거야? 그 친구가 게이였던 거...?”


“아니 걔도 아닌데.”


“음...(상황 파악을 잘 못하고 눈을 굴리고 있다) 그렇다면 술... 술을 많이 마셨나?”


“조금 마시긴 했는데 막 인사불성되고 그런 정도는 아니었고. 왜 그럴 때 있잖아. 적당히 취하고 서로 마음 속 깊은 이야기하고 조금 울다가 뭐 그런 분위기. 그때는 다들 굉장히 감정적이었어.”


“그... 그건... 너무 뭐랄까... 게이스러운 분위기인데...”


“말해놓고 보니 그러네. 그때는 그러고 싶었어. 자연스러운 행동이었고. 지금도 그 친구랑은 아무 문제없이 잘 지내.”


“막스 너는 스스로를 양성애자로 생각하는 거야?”


“그렇게 단언하기는 어렵고, 성별의 문제는 아니고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하지. 내가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다른 거야. 요지는 누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거지.”


지금껏 누구와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런 순간의 감정이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나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누굴 사랑할 수 있었을까. 사랑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가 부러웠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자니 루드빅이 상모를 돌리며 잠에 빠져드는 것이 보였다. 새벽 4시 반. 이제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눈을 붙일 시간이었다. 어지러운 테이블을 정리하려고 하니 번쩍 눈을 뜬 루드빅이 자신이 할 거라며 손도 대지 못하게 한다. 다음 날 오후에 스웨덴으로 휴가를 간다는 그와는 오늘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낯선 나를 환대해 준 그에게 악수를 청하며 정식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모두들 집에 가는 순간까지도 자신은 괜찮으니 아침까지 놀다가 밥 먹고 가라고 했다. 이러다가 콩나물 해장국 먹으러 가는 거 아닐까 싶었다. 마치 한국 친구 집에서 밤새 술 마시고 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처음 그와 길게 이야기를 하던 며칠 전, 나는 그에게 베를린 사람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어줘서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도시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고백했다. 나의 베를린 찬양을 듣고 있던 루드빅이 말했다.


“그건 안나 네가 다른 사람들을 그런 따뜻한 시선으로 보고 있기 때문 일거야.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행동하는 만큼 대접을 받기 마련이거든.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금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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