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니까

8월 4일

by 안나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날.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어나 [헝거]를 조금 읽었다. 머리가 무겁고 피곤하지만 어쩐지 힘차게 돌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미친 날씨를 보여주던 베를린이 화창하고 아름다운 여름의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어쩌나, 나는 이제 폭염으로 사람들이 쓰러지는 서울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데.


KakaoTalk_20190821_152925025.jpg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베를린

오늘은 점심을 먹고 니콜라이피어텔*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관광객 모드가 되어 구경을 해 볼 계획이다. 떠날 때가 되니 한국의 지인들이 보고 싶었다. 보쌈과 막국수도 참을 수 없이 먹고 싶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마지막 마실에 나섰다. 니콜라이피어텔은 중세 지구처럼 예쁘게 꾸며놓은 곳이라, 옛날 옛적 독일 마을을 구경하고 싶은 관광객들에게 적합한 곳이다. 일요일이라 사람도 적당히 많았다. 거리 곳곳의 조각상들을 구경했다. 더 늦기 전에 한국의 지인들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사야 했다.


바로 이동하기 아쉬워 조금 걷다가 처음 투어 때 방문했던 젠다르멘마크*를 지나가게 되었다. 18세기 독일과 프랑스 양식의 대성당이 양쪽 끝에 위치하고 그 가운데 콘체르트하우스가 떡 하니 자리한 베를린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다. 그 날과 다르게 오늘은 웅장한 클래식 음악이 광장에 가득 차 있었다.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유럽은 물론이고 전 세계의 유소년 오케스트라가 콘체르트하우스에서 매일 밤 공연을 하고 있었다. 밤 공연을 위한 리허설을 하는 중이었는데, 무슨 연유에서였는지 거대한 스피커를 통해 광장으로 음악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학생들이 연주하는 교향곡을 듣고 있었다.


삶의 어떤 순간은 너무나 완벽해서 그것을 기록하기 위한 어떤 시도도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게는 바로 오늘의 오후가 그런 몇 안 되는 순간이었다.


아주 예전에 기억도 나지 않는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어느 감독이 자신의 스태프들에게 말하는 장면이 스쳤다.


우리 영화 찍으려고 사는 거 아니잖아. 살고 싶으니까 영화 찍는 거지.


그때는 너무 어려서 도대체 저게 무슨 병신 같은 소리인가 한참을 고민했다. 서른다섯이 넘어서야 드디어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살고 싶으니까 낯선 도시로 떠나고, 살고 싶으니까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베를린에서 꽤나 유명하다는 초콜렛 전문 상점*에 들러 양손 가득 초콜릿을 샀다. 소박한 도시의 풍경과는 사뭇 다르게 3층으로 이뤄진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1층에는 초콜릿이 가득했다. <찰리와 초콜릿 공장>의 연구실이자 쇼룸 같았다. 어딘가에서 움파룸파 족들이 음악에 맞추어 초콜릿을 찍어내는 것만 같았다. 베를린의 유명한 관광 명소를 초콜릿으로 만들어놓은 작품도 여럿 있었다. 브란덴부르크 문이 정확하게 이렇게 생겼군.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 곳을 초콜릿 모형으로 복습했다.


초콜렛을 사들고 3층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 초콜릿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독일 곳곳은 물론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로 가득 했다. 나의 서빙을 담당한 직원의 유니폼에는 국기 모양의 작은 배지가 세 개 달려 있었다. 독일, 미국, 스페인. 이 세 가지의 언어를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어느 테이블에는 나이가 지긋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함께 초콜릿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 중 한 아저씨가 오늘 이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그들의 사진을 찍었다. 필름 카메라였다. 아직도 필름 카메라를 쓰는 사람이 있다니. 그의 일상은 한국에서의 나의 일상과 수백 광년은 떨어져 있겠지.


집으로 돌아와 진짜 마지막으로 짐정리를 했다. 루프트한자의 수화물 무게는 23킬로그램. 생각보다 빡빡한 조건에 무거울 것 같은 책은 백팩으로 옮겨 담았다. 한국이랑 달라서 0.1그램 초과도 봐주지 않는다던데. 에이 몰라. 돈 더 내라고 하면 내야지*. 베를린까지 기껏 가져와놓고 한 번도 신지 않은 샌들과 입지 않은 옷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행 갈 때 가져가는 짐의 무게가 전생의 업보라는데. 전생이라는 것이 있었다면 나는 아마 나라를 열다섯 번 정도 팔아먹은 인간이었나 싶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아 저녁은 생략했다. 해질 무렵, 단트라에서 마지막 라들러를 마시고 막스와 한참 이야기하다가 작별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서로의 건강과 행복을 빌면서. 평소 나답지 않게 메신저 앱에 그의 연락처를 저장했다. 우리가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일이 있을까.


집으로 돌아오니 말끔해진 나의 작은 방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정말로 한국에 있는 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까 막스에게 나는 사실 세상 어디에서든 늘 낯선 곳에 있는 것처럼 느낀다고 고백했다. 집에 있는데도 집에 가고 싶은 자이언티의 노래 가사처럼.


마음을 잡을 수 있겠지.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 Nikolaiviertel 13세기 초반에 지어진 니콜라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중세 마을 지구. 이렇게 써놓으면 중세 마을이 보존된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베를린 설립 기념 750주년을 맞아 1987년에 조성된 구역이다. 속았지? 그리하여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예쁜 카페와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그 중에서도 단연 눈길을 잡아끄는 곳은 각종 목각 인형이 즐비한 상점이다. 그 아름다운 인형들이 캐리어 안에서 부서질까봐 차마 살 수 없었다. 절대로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오늘도 라면 먹어야지...


* Gendarmenmarkt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고.


* Rausch Schokoladenhaus 베를린에서 초콜렛 맛집으로 그렇게나 인기가 많단다.


* 다행히 21킬로그램이었다. 백팩 무게도 잴 줄 알았는데 안 재더군. 어깨 빠지는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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