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Lee Dec 06. 2022

겨울의 길목에서

영화 <Groundhog Day>를 보고

오래전에 본 영화 하나가 생각난다.

빌 머레이(Bill Murray)와 앤디 맥도웰(Andie MacDowell) 주연의 <Groundhog Day>(1993) - 우리말 번역은 <사랑의 블랙홀>이다.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는 매년 2월 2일 그라운드호그라 불리는 마멋이란 동물에게 봄이 언제 올 것인지를 묻는 풍습이다.


까칠하고 자기밖에 모르는 기상 캐스터 필(Phil)은 그라운드호그 데이 취재를 위해 프로듀서 리타(Rita), 카메라맨 래리(Larry)와 함께 펜실베이니아의 펑서토니라는 작은 마을에 간다.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는 방송이 끝나자마자 피츠버그로 돌아가려 하지만, 때마침 내린 폭설로 발이 묶이고 만다.

불평을 한가득 안고 잠자리에 든 그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다음날도 또 그다음 날도 계속되는 2월 2일 - 매일 아침 똑같은 라디오 방송에 눈을 뜨고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일들이 그에게 반복된다. 아무리 애를 써도 도무지 그에게 내일은 오지 않는다.

자신의 상황을 설명해 보려 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자 공포를 느낀 그는 식당에서 만난 남자들과 난폭운전을 하다 감옥에 가기도 하고, 몸에 안 좋은 음식을 폭식하거나 여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아무리 다른 곳에서 다르게 하루를 마무리해도 다음날 눈을 뜨면 어김없이 2월 2일 아침이다.

똑같은 날이 견딜 수 없이 지루해지자, 필은 반복되는 날들을 이용해서 리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 그녀를 유혹하려 한다. 그러나 그를 믿지 않는 리타에게 매번 거절을 당하자 필은 지치고 절망한다.

늪 같은 그라운드호그 데이에 빠져 옴짝달싹 못하게 된 그는 2월 2일의 방송 리포트를 끊임없이 되풀이해야 한다. 그는 말한다, "이 겨울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날씨를 예보하는 주인공과 봄을 예견하는 마멋, 둘의 이름은 공교롭게도 같은 '필'이다. 봄이 오려면 아직 6주 더 기다려야 한다는 마멋 필과 끝나지 않는 그라운드호그 데이에 갇혀버린 필.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긴 겨울과 그들은 어딘가 닮아있다.

빠를 땐 10월 말부터 시작해 5월까지도 눈이 오는 이곳의 겨울. 며칠을 줄기차게 내린 눈 때문에 현관문이 열리지 않을 땐 혼자 다른 세상에 갇혀있는 느낌이 든다. 무릎까지 쌓인 집 앞 눈을 삽으로 퍼낼 땐 외투는 물론 털모자에 털장갑으로 꽁꽁 무장해도 심장까지 덜덜 떨리는 것 같다.

매년 이맘때면 아직 채 오지도 않은 겨울을 밀어내고 싶어 진다. 제일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 것도 이곳에 살고부터다.


필은 앞으로 있을 일들을 맞춰냄으로써 리타의 믿음을 얻어 그날 밤 같이 있게 된다. 잠든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자신의 마음이 진심임을 깨닫게 된 필은 그때부터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하루를 쪼개 피아노와 얼음 공예를 배우고 사람들에게도 한결 친절해진다.

길 모퉁이에서 마주치던 홈리스 노인이 그날 죽을 것을 알게 된 필은 그를 살리기 위해 온갖 방법을 동원해 애를 쓴다. 그러나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그를 보며, 매일 같은 날 아침에 깨어나는 자신과 노인의 운명은 다르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과 사람에 대해 진지해진 그의 멘트가 사뭇 달라진다, “겨울은 인생 주기에서 또 다른 한 발짝일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 펑서토니 사람들 사이에서 그들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는 지금, 길고 찬란한 겨울보다 더 나은 운명을 나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매일 똑같은 날이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 그는 마을 사람들 거의 모두를 알게 되고 그들을 돕는다. 자신의 삶과 운명을 깊이 있는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아직도 여전한 2월 2일 그라운드호그 데이.

필은 방송에서 의미 깊은 연설을 하고 사람들을 도와주며 저녁엔 마을 파티에서 멋진 피아노 연주를 한다.

리타의 마음을 얻은 그는 그녀와 함께 길었던 하루를 끝내고 마침내 다음날 아침을 맞게 된다.


사진 Projected Realities


개봉한 지 30년이 다 됐으니 어찌 보면 구닥다리 영화일 수 있다. 그러나 영화가 주는 메시지는 지금도 따끈따끈하다.

필은 자신이 싫어하는 날, 싫어하는 공간에 갇혀버린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데 그와 달리 만약 인생 최고의 순간, 가장 기쁜 날이 내게 무한 반복된다면 어떨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하고 또 만끽하면 행복할까. 오늘과 다른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 기대도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살아 있는 것에 그쳐야 할지 모른다.

매일 다른 아침에 눈뜰 수 있음이, 일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생각하면 전율이 온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매일이 똑같지 않기에 소중하다.


필 주변의 사람들도 그가 점차 달라짐에 따라 매번 다른 하루를 살고 있다. 필과 달리 그들에겐 단 하루인 날이지만, 필이 그들을 돕고 사랑하게 되면서 행복한 하루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필이 반복해서 살아야 했던 두꺼운 하루 켜켜이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리타에 대한 사랑이 쌓여 간다.

어쩌면 우리의 하루, 아니 한 시간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두꺼운 시간인지 모른다. 필이 만났던 카이로스의 시간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간들 어디쯤에도 있는지 모른다.


이곳의 길고 긴 겨울은 마멋 필이 겨울잠을 자는 동굴처럼 깊고 어두울 것이다.

그러나 가을을 다시 발견했듯 올 겨울도 내게 새로울 것이라 믿어본다.

매일의 일상에 감사하고 주위 사람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으로 이 겨울을 바라볼 것이다.

겨울이 시작되려는 지금 나는 벌써 봄을 느낀다.


사진 iStock


매거진의 이전글 아동기는 예술가들과 그 작품에 어떻게 영감을 주는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