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며칠 만에 남편이 캘리포니아로 출장을 갔다.
아직 낯설기만 한 집에서 나흘을 혼자 지내야 했다. 지독한 길치에다 지도 보는 눈도 어두운 내게 혼자서 집 밖은 위험하다.
그런 나를 잘 아는 아이들이 우리 집에 와 같이 지내주기로 했다. 비행기 두 시간에서 지하철 두 정거장으로의 변화, 그 위력이 대단하다.
하룻밤 정도 같이 자 주려나 했는데, 막내는 아예 매일 우리 집에서 등하교를 한다. 첫째는 우리 집을 들락거리며 올 때마다 며칠 굶은 사람처럼 먹을 걸 찾는다.
혼자서 여유롭게 책도 읽고 글도 쓰려던 내 기대는 설거지 세제거품이 되고 말았다. 다시 가사노동의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비비적거림과 내 영역 침범이 꼭 성가시지만은 않다. "아, 뭐야, 왜 또 와" 이러면서도 입가로 삐질삐질 새어 나오는 웃음을 관리하게 된다. 나도 알 수 없는 내 마음이다.
아이들이 독립을 해도 한번 엄마는 영원한 엄마, 빼도 박도 못하는 자리가 엄마다.
살면서 내가 만나는 일들이 신의 계획 안에서, 그리고 자연의 섭리를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게 뭐든 두렵지 않을 것 같다. 기뻐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싸우는 일에 아낌없는 에너지를 쏟고 싶다.
때로 내 뜻대로 안 되더라도 그것조차 내가 알 수 없는 커다란 질서 속에 벌어지는 일이라면 받아들여야겠다. 그래야 주저하지 않고 앞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쁜 일이 언제까지나 나쁘지만은 않고 좋은 일이 끝까지 좋으리란 법도 없으니, 두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도 두려워야 한다면, 내 다음 세대를 기꺼이 두려워해야겠다.
힘세고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닌, 아직은 어리지만 내 다음을 살아갈 미래세대에게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아야겠다. 그들이 나보다 강해지길,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후회하고 반추하고 변명하면서, 상처에 너무 기대어 살아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대를 혹은 나 자신을 지금 당장 용서할 수 없더라도, 상처에 머물지 말고 가던 길을 가야 하는 이유 ⎯ 핑계는 나를 약해지게 하기 때문이다.
자세히 바라보면 어둠이 다가 아니다. 어둠에도 내 마음이 투영된 색이 있다.
짙은 어둠에서 빛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다.
오전 내내 비와 함께 흐리멍덩하던 날씨가 천천히 개고 있다. 드러나는 햇빛 아래 맞은편 아파트의 붉은 벽돌색이 점점 선명해진다.
이곳은 태어나 처음으로 내가 선택한 곳이다. 적극적인 선택이 도시 전체를 아름답게 보이게도 한다는 걸 알았다.
아직 일상의 트랙에 완벽하게 올라타진 못했다. 일상을 회복하는 데에도 얼마간의 용기가 필요한가 보다.
새로운 곳을 알아 가며 만들어 가는 일상이 새 봄과 함께 다가오는 게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