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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Apr 19. 2023

꽃을 말하다

우리 집에 화분이 하나 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에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른다. "네가 화초를 키운다고?"

도시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란 나는 식물을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어른들이 키우는 화초에도 별 관심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 멍하니 서있는 식물은 내겐 너무 지루했다.

잘 모르고 관심도 없는 식물 이름과 분류를 외워야 했던 생물은 학교 때 괴로운 과목 중 하나였다. 식물은 재미없는 것, 내 머리를 아프게 하는 것으로 굳히는 데 생물시간이 일조를 한 셈이다.

그 후 내게 온 식물은 모두 더 이상 땅에 머물지 못하고 하늘로 날아가 별이 되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상하게 단 하나의 식물도 살아남지 못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선인장도, 심지어 에어 플랜트도 그랬다.


이십여 년 전 선물을 하나 받았다. 어항식물이었다. 이름 모를 풀 하나가 자라고 있는 아래로 작은 금붕어 한 마리가 어항을 헤엄치고 있었다.

어릴 때 키우던 금붕어가 죽어있던 모습을 본 뒤로 금붕어 키우기도 꺼렸었다. 키움기피 대상 두 가지를 한꺼번에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다. 지금까지 받아본 선물 중 가장 마음에 안 들었다.

어떻게 하면 풀도 붕어도 살릴 수 있을까, 밤잠까지 설치며 고민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들이 내게 온 지 이틀째 된 날 아침 나는 금붕어의 하얀 배를 보았고, 그대로 화초를 들고 엄마에게 가 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이후 집에 손님이 오는 날이면 나는 현관문 앞에 '식물 사절'이란 말을 붙여놓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2년 전 내 생일에 가까이 살던 친구 아들에게서 화분을 선물 받았다. 크리스마스 캑터스 ⎯ 크리스마스 때쯤 꽃이 핀다고 해서 '크리스마스 캑터스'라고 한다.

정말 오랜만에 받아보는 화분 선물이었다. 그러나 속으로 두려움이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 집에 오고 얼마 안 있어 몇 개 안 되던 꽃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얘랑도 곧 이별이구나 생각했다.

그래도 언제나처럼 물은 열심히 주었다. 크캑(내가 붙인 크리스마스 캑터스의 애칭)은 두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도록 단 한 개의 꽃도 피지 않았지만, 나를 만난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식물에 대한 지식도 없고 식물을 제대로 키워본 적도 없는 내가 크캑에게 해줄 수 있는 거라곤, 일주일에 한 번씩 물을 주고 가끔 자리를 바꿔주며 다정한 눈으로 바라봐 주는 것이었다.

말도 걸어봤다. "아, 예쁘다", "꽃 좀 피워봐", "내가 뭘 도와줄까?" 옆에서 남편이 의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이곳으로 올 때는 작은 박스에 크캑을 조심스럽게 담아 차에 싣고 왔다. 그리고 오자마자 조금 더 큰 화분으로 이사시켜 주었다. 우리처럼 크캑도 새 집에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 달쯤 됐을 때, 크캑의 심상찮은 모습을 포착했다. 작디작은 다른 꽃망울들과 달리 어느새 쑥 커버린 꽃망울 하나를 발견했다. 꽃망울은 하루가 다르게 커지며 붉은색을 띠기 시작했다.




지난주, 나는 이 작고 기특한 친구가 피워낸 꽃을 볼 수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아닌, 부활절이 며칠 지난 어느 날이었다.








설마 내가 식물에 대한 글을 쓰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러나 이 기적을 글로 남기지 않을 수가 없다.

꽃 한 송이 갖고 호들갑을 떨지 않을 수가 없다.

자연의 위대함을 노래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늘도 꽃의 무게를 견디는 줄기를 바라보며, 나는 그동안 내가 크캑에게  쏟았던 마음이 사랑임을 깨닫는다.

크캑이 내게 늘 해주고 싶었을 자신의 말 '불타는 사랑'을 이제 내 언어로 받아들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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