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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l 06. 2023

나의 자리

작은 책상 하나를 새로 들였다. 세로 20 인치, 폭 40 인치의 아담한 테이블이다.

전에 살던 집에서 쓰던 테이블이 너무 낡아 아파트로 이사하며 버린 후론, 줄곧 부엌 카운터탑이 글 쓰고 책 읽는 자리가 돼 왔다.   

이곳으로 또 한 번의 이사를 계획하며, 나는 이번엔 꼭 내 테이블을 가져야지 했다. 카운터탑이 불편해서라기보다 나만의 공간이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엔 큰 딸이 태어나던 해 들인 벤치가 있다. 그 무렵 인도네시아에 사시던 시부모님께서 아기 침대로 쓰라며 보내주신 것이다. 조각들이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나무의자는 손으로 만든 것이라 더욱 주변 분위기를 압도하는 독특함을 지니고 있다.

문제는, 예쁘다고 감탄하면서도 사람들이 왠지 이 의자에 잘 앉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로 옆 바닥에 앉아서는 의자에 등을 기대거나 한쪽 팔을 걸친다.

20여 년의 세월을 함께해 온 탓에 군데군데 낡은 데다, 나무로 만들어져 딱딱함을 풍기는 게 그 이유일 것이다. 의자에 어울리는 쿠션을 찾기도 여간 어렵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 쿠션도 놓지 않을 때 의자 자체의 멋스러움이 살아나는 것 같기도 했다.


의자인 듯 의자 아닌 의자 같은 이 의자를 나는 내 책상으로 쓰기로 했었다.

그동안 우리를 따라 여러 곳을 다니며 아기 침대로, 소파 대용으로, 선반으로 쓰이던 의자는 이제 내 테이블로 정착하는 듯했다.

방에 들여놓고 좌식의자를 놓으니 높이도 대충 맞고, 제법 그럴듯한 좌식책상이 됐다.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할 뻔한 의자를 활용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 한 달쯤 지나자 앉고 일어설 때마다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게다가, 테이블과 바닥 사이가 너무 좁아 나의 두 다리는 엉거주춤 불편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무릎과 허리 통증이 점점 심해지자, 결국 새 테이블과 의자를 들이기로 했다. 벤치는 다시 거실로 내놓고 매트리스와 담요를 깔아 최대한 아늑해 보이도록 했다.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갖게 된 나만의 테이블 ⎯ 시간이 지날수록 이것저것 올려놓고 싶은 게 많아졌다.

어느 소도시에서 산 어릴 때 갖고 놀던 것과 비슷한 인형과, 둘째가 그린 것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그림을 테이블 한쪽에 놓았다. 읽고 싶은 책 서너 권, 저널과 다이어리, 랩탑도 놓아보았다. 펜들을 담는 내가 직접 만든 컵과 조그만 선풍기도 놓으니 부러울 게 없었다. 마주 보이는 하얀 벽엔 그림엽서들도 몇 장 붙였다.


오랜만에 내 공간을 꾸미고 있으니 학교 다닐 때 생각이 났다.

새 학기를 맞을 때마다 설레며 앉아보던 옛 교실의 내 책상이 그리웠다.

초등학교 때 짝꿍과 다투고 지우개로 책상 가운데 경계선을 만들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고등학교 때 마음 다잡고 시험공부한다고 크지도 않은 책상을 온통 정리하곤 지쳐서 공부 대신 엎드려 자던 웃픈 기억, 친구랑만 알아볼 수 있는 글귀를 한 귀퉁이에 써놓고는 자리 바꿀 때 책상까지 들고 가다 선생님한테 혼나던 기억, 친구들과 알콩달콩 도시락 까먹을 때 손수건을 펼쳐 깔아놓으면 근사한 식탁도 돼주던 책상에 대한 기억, 기억들. 

세상 누구보다 나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던 그 시절 내 책상이 오랜만에 안부를 물어오는 것 같다.


긴 시간을 돌아 다시 나의 자리에 앉아본다. 그리고 다시 나의 꿈을 꾸어본다.

여기서 만들어 갈 나만의 세상이 무척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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