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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Oct 30. 2023

커피콩을 갈며

오랜만에 그라인더에 커피콩을 갈았다. 집 근처 카페의 커피가 너무 맛있어 샀다며 첫째가 건네준 커피콩. 순식간에 진한 커피 향이 온 집을 채운다.

아침마다 남편은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만든다. 내가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는 사이, 그가 뉴스나 음악을 들으며 커피를 만드는 게 우리의 아침 일상이 되었다. 그 덕에, 주방에서 풍겨오는 커피 냄새를 머리끝에서 발 끝까지 뒤집어쓰며 하루를 시작한다.

우유나 시럽이 들어간 달콤한 커피를 즐겨 마시던 내가 하루 한 잔 블랙커피에 정착하기까지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도 했다.


오래전 포틀랜드에서 처음 해외생활을 시작했을 때, 별다방이나 로컬 카페 커피를 적어도 하루 두 잔씩은 마셔댔던 것 같다. 두어 달쯤 지나고 나서, 타지생활의 스트레스와 입에 안 맞는 음식 때문에 빠졌던 살이 도로 찌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웃 사는 한국분에게 왜 체중이 느는지 잘 모르겠다고 하자, 그녀가 말했다. "커피를 줄여 봐요. 그게 힘들면 블랙으로 마시거나 무지방 우유를 넣어 마시든지요."

저지방이나 무지방 우유가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그때부터 설탕과 우유를 조절한 커피를 주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커피의 쌉싸름한 맛과 어우러지는 단 맛은 끝내 포기하지 못했다.

나의 수십 년 커피 사랑은 아무도 못 말렸다. 위염 증세가 있으니 더 심해지기 전에 커피를 끊는 게 좋겠다는 의사 선생님께도 "저랑 커피랑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 할 정도였으니까. 책을 읽을 때도 공부를 할 때도 사람을 만날 때도 늘 커피와 함께였다. 커피 없는 삶은 상상할 수가 없었다.


올해 초 뉴욕으로 이사와 집 정리를 시작할 무렵부터 아침 두통이 끊이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두통을 달고 살아온 나는 이번엔 그저 환경이 바뀐 탓이겠지 했다. 두통은 아무 때나 나를 찾아오는 친숙한 방문객 같았다. 마침 5월에 건강검진 예약이 돼 있어 그렁저렁 약으로 달래며 지냈다.

그런데 5월 서울에 가 한 달을 지내는 동안에는 단 한 번도 머리가 아프지 않았다. 나는 두통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고, 건강검진 결과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온 후 다시 시작된 두통. 심할 땐 머리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느 날 남편이 내게 아직도 잠자리에 들기 직전까지 커피를 마시냐 물었다.

사실, 나는 아침에 눈 뜰 때부터 밤에 잠자기 전까지 입에 커피를 달고 다녔다. 앉은자리에서 커피를 다 마시지 못하고 조금씩 계속 마셨다. 그러다 커피잔을 어디다 뒀는지 몰라 헤매 다니기도 부지기수였다. 어쩌면 이것도 내 산만함과 연결된 습관이었는지 모른다.

나의 카페인 의존도가 높아 보인다며, 남편은 아침에 머리가 아픈 것도 카페인 금단증상 같다고 했다. 하루종일 홀짝대던 커피를 자는 동안엔 마시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럼 서울에 있을 땐 왜 한 번도 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해 봐, 그땐 시차적응한다고 커피 마셨지 피곤하다고 피로회복제 먹었지, 몸에 카페인을 계속 공급해 줬던 거야. 그러니 머리 아플 틈이 없었겠지."

남편의 말을 듣기 전까지 나는 단 한 번도 커피와 두통의 관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시험 삼아 커피 양을 줄여 보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마시는 커피 한 잔 외 다른 카페인 음료를 모두 멀리했다. 특히 오후엔 커피를 입에 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렇게 쉽지 않은 한 주를 지내고 나자, 거짓말처럼 두통이 사라졌다.


이제야 내 커피 습관이 그동안 얼마나 잘못돼 있었는지 보이기 시작했다.

카페인이 빠져나가면 피로감을 느끼고, 그 피로감을 지우기 위해 다시 커피를 마시는 악순환의 고리에 갇혀 지냈던 것이다. 집중을 잘 못하는 나 자신을 은연중에 느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고, 점점 더 커피에 의지하게 됐던 것 같다.

친구 같은 커피와 건강하게 만나려면 안 좋은 습관을 버려야 함을 깨달았다.

아침마다 마시는 핸드 드립 커피에 맛을 들이니 달달한 커피도 별로 찾지 않게 된다. 아주 가끔 동네 카페에서 나 자신에게 라테 한 잔을 선물할 때 빼고는.


내 몸이 나에게 보내는 신호에 둔하지 말아야지. 아는 습관도 다시 봐야지. 그리고 하던 대로 하는 게 편하다는 느슨한 유혹 앞에, 옛날 어릴 때 습득해 뒀던 조절력을 발휘해 봐야겠다. 잘게 바수어져 진한 맛과 향을 내는 커피처럼 나이 켜켜이 지혜로움을 쟁이고 싶다.

하루 단 한번 아침에 만나게 된 커피. 아기가 처음 이유식을 먹을 때처럼, 오늘도 한 모금 한 모금 음미하며 감탄을 섞어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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