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에 비친 나에게 누구냐고 묻고 싶었다.
짧게 잘랐던 머리는 어느새 텁수룩해지고 군데군데 흰머리는 눈가 주름과 너무나도 잘 어울렸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었다고 이렇게까지 외모에 신경을 꺼도 되나 싶었다.
예전엔 미용실에 가면 편안하고 기분도 바뀌곤 했는데, 요즘은 왠지 미용실 가는 데 게을러져 한 번 가려면 큰 맘을 먹어야 한다.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까지 나갈 생각을 하니 더욱 귀찮아졌다. 그러다 문득, 산책할 때 본 미용실이 떠올랐다. '미용실'이란 한글 간판이 반갑기도 했던 곳이다.
예약을 하고는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 걸어서 5분이면 미용실에 갈 수 있다니 믿기지 않았다.
미용실에 도착하니 빨간 블라우스에 검정 앞치마를 두른 사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사장님 것으로 보이는 옷걸이의 빨간 재킷과 입술에 바른 붉은 립스틱으로 보아, 빨간색을 좋아하시는 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미용실 안은 밖에서 볼 때와는 달리 널찍했다. 부스도 네 개나 되고 미용도구들을 두는 곳도 넉넉해 보였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사장님 혼자 일하고 계시는 듯했다. 세월의 흔적이 묻은 오래된 의자와 벽시계를 보고 있자니 마치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내 머리를 만지며 사장님은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미국에 먼저 와 있던 오빠들을 따라 이민 오게 된 이야기,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던 시절 이야기, 신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택한 결혼이었지만 좋은 사람 만나 사랑하고 행복하게 살아온 이야기, 미용 일을 하며 겪은 인종차별에 대한 이야기까지 마치 한 편의 장대한 서사를 읽은 기분이었다.
그 누구의 삶도 역사이고 장편소설일 것이다. 순간이 모이고 세월이 쌓이는 사이 우리의 삶은 수많은 사연과 감정을 품게 되겠지. 끝이 예정된 책이 곧 삶이라 해도 좋다. 결말과 상관없이 한 챕터 한 챕터가 재미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염색약을 바른 머리에 열기구를 쬐며 기다리고 있는데 사장님이 물어오셨다. "커피 한 잔 줄까요?"
나는 "네, 고맙습니다." 했다. 밖에 나갔다 잠시 후 돌아온 사장님 손에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내 것과 당신 것 두 잔을 옆 카페에서 사 오신 거였다. 미안해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사장님은 연거푸 커피를 권하며 웃으셨다.
평생을 열정적으로 일하며 살아오신 사장님, "이제 딱 오 년만 더하고 그만할 거예요" 하신다. 그런데 그러실 것 같지가 않다. 단골손님들을 만나기 위해서라도 오 년이 아니라 십 년 뒤에도 미용실 문은 계속 열려있을 것 같다.
"로또가 별 건가. 별일 없는 평범한 하루가 로또지. 그러니까 우린 다 로또 맞고 사는 거야." 사장님 말씀에, 그동안 끌고 다녔던 나태 추태 권태 삼종 세트가 내게서 떠나는 것 같았다. 더 간절하게, 더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단풍 같은 붉은빛이 살짝 감도는 내 머리를 보니 마음이 밝아졌다.
문 앞까지 배웅하며 사장님이 "또 와요. 다음엔 보라색으로 해줄게" 하며 웃으신다. 햇살에 비친 얼굴 너머로 옛날 미용 일을 배우던 소녀의 모습이, 때로 울고 때로 즐겁기도 했을 그녀의 표정들이 떠올랐다. 겉모습을 넘어 누군가의 마음을 볼 수 있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나 또한 다시 중학생이 되어 그 시절 미용실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시간여행이 가능한 공간 ⎯ 사장님의 미용실과 그분의 연륜이 만들어낸 마법이 아닐까.
다음엔 내가 커피 두 잔을 사들고 놀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