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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Nov 03. 2023

검은 모자 아저씨

언젠가부터 그는 아이 곁에 있었습니다.

어느 밤 자다 깬 아이가 어둠 속에서 처음 본 그는 검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커튼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달빛이 아니었다면 아이는 어둠에 묻힌 그를 못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주위가 캄캄해선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탓인지,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아이 곁에 머물 뿐이었습니다.

그날부터 아이가 가는 곳엔 검은 모자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혼자 밥을 먹을 때도 아이는 옆에 검은 모자 아저씨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학교 가는 길에도 검은 모자 아저씨는 아이와 함께였습니다.

첫 교시 수업이 시작되기 전 아이들이 와글와글 떠들 때도, 시험을 볼 때도 검은 모자 아저씨는 아이 옆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검은 모자 아저씨를 못 본 것 같았습니다.

엄마가 바쁠 때 아이는 학교를 마치고 엄마 친구가 하는 약국에 가서 엄마를 기다렸습니다. 그때도 검은 모자 아저씨는 함께였습니다.

약국에 들어오는 손님들은 검은 모자 아저씨를 못 본 것 같았습니다. 아이와 함께 있는 검은 모자 아저씨를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도 검은 모자 아저씨는 여전히 아이 곁에 있었습니다.

아이는 검은 모자 아저씨가 무섭지도 싫지도 않았습니다. 아저씨에게 먼저 말을 걸어볼까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가 말을 걸고 싶을 땐 아저씨는 거기 없었습니다.

사실, 검은 모자 아저씨가 언제나 아이 옆에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

아이가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놀 때 검은 모자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그림을 그릴 땐 아이는 검은 모자 아저씨를 잊어버리기도 했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도 아이는 검은 모자 아저씨를 볼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언젠가부터 검은 모자 아저씨가 귀찮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다 친구들이 검은 모자 아저씨를 보기라도 한다면 혼자 못 있는 아기 같다고 놀릴 것 같았습니다.

어느 날 아이는 학교에서 과학실험을 하다가 그림자는 빛의 반대쪽에 생긴다는 걸 알게 됐습니다.

검은 그림자를 닮은 검은 모자 아저씨와 같이 다니지 않으려면 빛처럼 밝은 생각을 하면 될 것 같았습니다.

아이는 그때부터 자주 좋아하는 것들을 생각했습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한 행복했던 순간도 떠올렸습니다.

세상은 안전하고 재미있는 곳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러자 아이는 비로소 혼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어른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검은 모자 아저씨가 생각났습니다.

어른이 된 아이는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검은 모자 아저씨의 이름은 '불안감'이었다는 것을요.

그러자, 검은 모자 아저씨가 다시 온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습니다.

빛은 그림자 반대편에 생기기도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엔 언제나 그림자도 있기 마련이라는 걸 이젠 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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