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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a Lee Jun 02. 2024

따뜻한 기억

날씨가 꼭 여름날 같았다.

창 밖에 세 살쯤 된 여자아이와 엄마가 걸어가고 있었다. 노란 바탕에 작은 빨강 꽃들이 그려진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엄마를 따라 조롱조롱 걷고 있었다. 아이의 숱 적은 갈색 동그란 머리가 귀여웠다.

엄마는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어깨에 메고 있던 하얀 가방에서 음료수를 꺼내 빨대를 꽂았다. 아이는 목이 말랐는지 엄마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엄마는 그런 아이가 귀엽다는 듯 미소를 지어 보이며 빨대가 꽂힌 음료수를 아이 손에 쥐어주었다. 아이가 이내 음료수를 먹기 시작하자, 엄마는 이번엔 가방에서 파란 모자를 꺼내 아이에게 씌워주었다. 모자가 아이의 조그만 머리를 푹 덮었다. 엄마는 아이의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더니 모자를 벗겨 도로 가방에 집어넣었다.

아이의 동그란 머리가 다시 햇살에 드러났다. 아이는 한 손에 음료수, 다른 한 손에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조롱조롱 아기새처럼 걸어갔다.


여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와 서너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 그리고 그들의 엄마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가의 생일파티에 갔다 오는 길이었을까, 아니면 학교 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을까, 그들 손에는 각각 색깔 고운 풍선이 들려 있었다. 엄마는 노란 풍선, 여자아이는 보라색 풍선, 그리고 남자아이는 주황색 풍선을 쥐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풍선만큼이나 그들의 걸음도 가벼워 보였다.

엄마와 동생보다 반 걸음 정도 앞서가던 남자아이의 풍선이 갑자기 아이의 손을 떠나 찻길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마침 풍선이 날아가는 방향으로 차 한 대가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아이가 풍선을 잡으려다 위험해질까 아찔했다. 창을 열고 소리쳐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자동차를 본 엄마가 아이를 향해 뭐라 말하자 풍선을 쫓아가려던 아이는 멈칫했다. 그와 동시에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오던 차가 멈춰 섰다. 아마도 운전자가 풍선을 본 듯했다. 자동차 바로 앞에 떨어진 풍선을 아이는 무사히 주웠다. 엄마는 차를 향해 손을 흔들며 고맙다고 말했다. 아이와 엄마를 기다려준 차는 다시 천천히 출발했다.

나는 차도 아이도 떠나고 없는 빈 길을 자꾸만 바라보았다.




이웃에 유치원과 학교가 있어 아이들과 엄마들을 자주 보게 된다. 무심코 창 밖을 바라보다 발견한 그들의 모습은 마치 한 장의 그림처럼 내 머릿속에 새겨지곤 한다. 그리고 가끔 어떤 장면에선 가슴이 뜨거워지고 눈물이 나기도 한다.

내 마음 깊숙이 따뜻함이나 부드러움에 대한 갈망이 있는 걸까. 어쩌면 상처받은 마음을 스스로 다독이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내가 키우기 힘든 아이였다고 말하곤 했다. 예민하고 고집이 셌다고. 납득되지 않는 일은 절대 받아들이지 않으려 하고, 일찍 트인 말로 따지기도 잘했다고.

나는 엄마가 나를 따뜻하게 대해줬으면 했다. 내가 어떤 아이인지 따지지 않고 나를 품어줬으면 했다.

엄마의 포근함에 목말라하며 자란 나는 부족한 따뜻함을 지닌 채 엄마가 되고 선생님도 됐다. 그리고 알았다. 아이들이 주는 사랑으로도 얼마든지 따뜻해질 수 있음을. 그렇게 채운 사랑을 다시 아이들에게 돌려줄 수 있음을.

그들이 내게 주는 사랑도 내 사랑 못지않게 큰 사랑임을 알았다.


봄에서 여름으로 가는 길목, 따뜻한 햇살이 거리 한가득이다.

하굣길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도 거리 한가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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