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의 사생활

by Anna Lee

어릴 때 부모님은 내가 밖에 나가 노는 걸 별로 안 좋아하셨다.

엄마는 내가 당신의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야 안심이 되나 보았다. 나를 외가나 친척집에 자주 맡기면서도 밖에 나가 친구들과 노는 건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밖에 나가기 위한 나의 피곤한 투쟁은 결혼하기 전까지 계속되어야 했다.


몇 년 전 서울을 다니러 갔을 때 아이들, 남편과 함께 친정에 머문 적이 있다. 오랜만의 친구들과의 만남에 밤 11시를 조금 넘겨 귀가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다 "왜 이렇게 늦게 다녀" 하시는 아빠를 보며 나는 속으로 외쳤다. '제가 졌습니다, 아버님!'


밖에 나가 한번 놀려면 몇 번이나 돌아올 시간을 약속해야 했다.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아도 허락을 얻으려면 울고불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부모님은 언제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못 가게 하셨다. 친구들은 너무나 쉽게 얻는 게 나한테는 왜 그리 어려운지 이해가 안 갔다.

허락을 얻기에 지친 나는 초등학교 3학년 무렵부터 부모님의 말씀을 대놓고 안 듣기 시작했다. 학교가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놀러 다니기도 하고,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으면 부모님이 허락해 주지 않아도 그냥 파티에 갔다. 설날 받은 세뱃돈을 종잣돈으로, 거기에 평상시 모은 용돈을 합하여 교통비와 친구 선물 비용을 마련할 수 있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친한 친구 생일에 초대를 받았는데, 내가 좋아하던 아이도 초대했으니 꼭 오라고 친구가 귀띔을 해 주었다. 생일 파티에 가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더니 친구 집이 너무 멀어 안 된다고 하셨다. 예상한 대로였다.

생일 파티가 있던 일요일 아침 가족들이 늦잠을 자는 사이, 나는 몰래 집을 빠져나와 친구 집에 갔다. 그리고 모든 걸 잊은 채 신나게 놀았다. 그날 오후 겪은 후폭풍은 내가 보낸 즐거운 시간만큼이나 컸다.

부모의 말을 어겼다는 이유로 혼줄이 나고도, 나는 짜릿한 나만의 사생활을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고, 내가 잘못하는 게 아니라는 확신이 마음 한 구석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싫어함에도 불구하고 버릴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사생활은 친구들과 함께 하던 군것질이었다.

수업이 끝나면 학교 앞 분식집에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먹고 떠들었다. 숙제하라는 잔소리, 엄마의 짜증, 동생의 괴롭힘을 피해 긴장을 풀고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서는 학교 근처에서 군것질하는 것을 금했었다. 만약 군것질을 하다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 눈에 띄면 그 주 학급회의 시간에 언급되고 반성문을 써야 했다. 그래도 고학년이 되면서는 단속이 좀 느슨해져서 신경 안 쓰고 다녔던 것 같다.

친구들과 즐기던 메뉴는 떡볶이, 라면, 튀김, 풀빵, 핫도그 등이었다. 집에서 먹으면 그저 그랬지만, 친구들과 먹으면 어떻게 그렇게 맛있을 수 있는지 신기했다.

그중에서도 떡볶이는 지금도 가끔 먹어주지 않으면 금단현상 같은 게 생긴다. 내 영혼이 부르는 그야말로 소울 푸드이다. 지금은 다양한 제품과 전문점까지 있지만, 내가 어릴 땐 밀떡으로 만든 떡볶이가 대부분이었다. 여중, 여고, 여대까지 밀집해 있는 곳에 살아서 주변에 맛있는 떡볶이 집이 많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면 반칙이듯, 나도 떡볶이 집을 그냥 지나친 적이 거의 없었다. 어릴 때 먹던 맛을 잊지 못해, 나는 아직도 쌀떡볶이보다 밀떡볶이가 더 좋다.


자라면서 '온실 속의 화초'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몇 번 있다. 세상 물정 모르고 곱게만 자란 거 아니냐는 말로 들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대학 때 이후로는 그 말을 들어보지 못했지만, 자유를 위해 나름대로 투쟁하며 살았는데 아직도 내게 부모님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부모님 말씀대로만 살았다면 친구들과 어울리는 즐거움, 용돈을 모으는 뿌듯함, 그리고 내가 하고 싶은 걸 스스로 결정해서 저지르던 짜릿함을 알았을 리 없다. 부모님한테 혼날 걸 알면서도 은밀한 사생활을 지켰던 건 어쩌면 그런 나만의 행복감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어서였을 것이다.

때로는 부모님이 만들어 준 테두리를 벗어날 용기를 냈던 나 자신에게 고맙다.

덕분에 나는 추억 부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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