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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간방 박씨 Jun 14. 2020

Y를 만나러 갑니다

Y도 주 5일 근무하면 좋겠다

사람이 죽을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떠오른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만약 나라면 어렸을 적 살던 마음속 고향 같은 H에서 뛰어놀던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몇 번 하곤 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몇 번의 고비를 넘겨 보니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거나 나팔을 부는 천사들이 나에게 친절히 다가오지 않았다. 몸은 땅 속으로 꺼질 듯이 힘들고, 바닥에 누워서 보이는 건 형광등 불빛뿐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즐거웠던 순간들이 많았다고 생각하는 그곳 H를 Y는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왔다. 지금도 H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다른 지방에서 학생들이 오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전교 앞자리 등수 안에 든다는 중학생들은 H고등학교로 진학을 왔다. Y도 그런 우수한 학생 중 한 명이었다. H고등학교를 졸업 후 Y는 서울로 대학을 갔다. 그리고 군생활을 하면서 종종 H로 오는 일이 생겼다. 내가 8년 간 살았던 관사가 그 부대와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었다.


Y는 취업을 한 후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프라하에 갔다. Y와 내가 프라하에 갔던 시기가 매우 비슷해서 어쩌면 프라하에서 우리 둘은 스쳐 지나갔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Y는 까를교 위에서 프라하를 느끼기보다는 다리 아래에서 책 한 권을 다 읽었다고 한다. 반면 나는 까를교만 5번 이상 왔다 갔다 하면서 신나게 방방 뛰고 다녔으니 다리 아래를 볼 여유 따위는 없었다.


가끔씩 외교부에 가면 서류 발급을 받기 위해 30분의 여유 시간이 생긴다. 그 여유 시간 동안 나는 항상 외교부 건너편에 있는 스벅 안에서 샷이 추가된 두유 라테를 마시며 창밖을 본다. 그러다 보면 Y군이 탄 차가 지나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사람 구별을 잘 못하는 나는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경우 얼굴도 전부 다 똑같아 보인다. 혹시나 해서 카톡을 보내 보면 그 날의 Y는 휴무였다.


Y가 나와 약속을 잡기 위해 '언제 시간이 편하세요?'라고 묻는 말은 예의상 한 말이었음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Y의 며칠 안 되는 주말의 휴일은 이미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전부 잡혀있었다. 주말 약속을 한 달 전부터 잡아야 할 정도로 간절하게 보고 싶은 Y는 아니다. 이번에도 조심스레 '평일에 쉬는 날은 없죠?'라고 묻는 Y에게 나는 이왕 볼 거 더 더워지기 전에 보자며 휴가를 하루 냈다.


휴가계를 올리고 나서 정확히 한 시간 뒤에 월요일 주간 회의를 들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영업회의 날짜가 잡혔다고 한다. 하필 그 많은 날짜 중에 바로 Y와 만나기로 한 그 날짜였다. 휴가를 미루는 건 상관없는데 Y의 일정표를 아직까지 이해를 못하는 나로서는 순간 머리가 복잡해졌다. 결국 윗선에 내 상황을 얘기를 하고 영업회의를 미뤄버렸다. 그래서 우리 부서의 영업회의는 3일 미뤄졌고 나는 일정대로 Y를 만나러 간다.


가끔씩 보면 Y는 나를 다독거리는 말을 많이 한다. '미안하다. 고맙다'라는 단어를 다른 사람들보다 입에 더 달고 사는 Y는 내가 좋은 사람이라는 얘기를 자주 해 준다. 이런 듬직하고 착한 Y를 전 여자 친구는 왜 찼을까 궁금하다. 아마 그 친구도 Y의 일정표를 나처럼 이해 못했거나 아니면 Y에게서 카톡 답이 바로바로 안 오는 것에 서운했던 걸까?


만나서 뭐 먹고 싶은지 카톡을 보낸 메시지에 1시간 넘게 답이 없는 걸 보니 Y는 오늘도 일하고 있는 중인가 보다. 조금 있다가 아니면 내가 자는 도중에 또 답이 늦어서 미안하다는 메시지가 오겠구나 싶다. 일을 통해서 새로운 자아를 찾고 있다는 Y의 근황이 매우 궁금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는 다음 주는 주 4일만 근무하면 된다는 사실이 더 신난다. 


지금까지 나는 나보다 일을 오래 한 경험이 많은 상사들한테 많은 것을 배워왔다. 하지만 이제는 Y와 같은 신선한 패기와 그만의 다소 독특한 열정이 지금의 내 상황에 더 필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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