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문간방 박씨 Feb 03. 2021

서울에서 산다는 것

Welcome to Seoul, Bienvenido a Seùl!!

Y가 서울로 이사를 왔다.

우리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을 타고 환승 없이 30분만 꾸벅꾸벅 졸면 Y의 집에 도착한다. Y는 재작년부터 서울에 오고 싶어 했다. 근무지가 서울의 중심지에 있는데 집은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으니 그는 아침 출근의 경우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Y는 2년 동안 서울에서 지낼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더니 결국은 맨 처음 생각했던 곳 바로 옆동네로 자리를 잡았다. 힘들게 서울에 왔지만 여전히 출퇴근 시간은 지하철로 4~50분 이상 걸린다. 나도 회사 다니기 전엔 출퇴근으로 소비하는 왕복 2시간을 어떻게 버티나 했는데 서울에서 이 정도 통근 시간은 기본이었다.


나는 Y가 서울에 온 것을 무척이나 환영한다. 왜냐하면 서울에서 사는 것은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선 더욱더 그랬다.




나는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고입시험을 봐야 했다. 그런데 시험 당일날 내게 번지수를 잘못 찾은 신이 내렸는지 국어, 영어 그리고 수학을 각각 1문제씩만 틀려서 생각지도 못하게 우수한 성적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고등학교에서의 첫날, 학주는 나를 포함한 몇몇 친구들의 이름을 수업 시작 전에 불렀고, 이유도 모른 채 어리둥절하게 서 있는 우리의 얼굴 도장을 찍었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해 보니 중학교와 분위기가 180도 달랐다. 중학교 때 문제를 일으키던 친구들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하고 엄청난 시골에 있던 학교로 배정이 돼서 중학교 졸업 이후로 그 친구들을 다시 만날 일은 없었다.


고등학교 3년 동안 나보다 성적이 우수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친구들보다 고작 영어 한 두 문제 더 맞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정작 서울로 대학을 올 수 있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성적에 관계없이 전교생의 80%가 근처 국립대를 갔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이 고등학교에는 딱히 동창회가 없었다. 그 대학에서 만난 동창들은 고작 교복을 벗었다는 차이 하나뿐이었다. 대학을 졸업하면 다들 결혼을 했다. 친구들이 남편이라고 소개해주는 사람 중에는 오빠 친구들도 많았고 신혼집 역시 고등학교 근처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아빠도 내가 집 근처에 있는 대학에 가길 바라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가도 취업이 불확실한데 (그 때나 지금이나 회사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집 근처 대학을 다니면서 남는 시간에 공무원 준비를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생각은 달랐다. 엄마는 나를 서울로 보내고 싶어 하셨다. 아빠 앞에서 의견을 내세운 적이 거의 없던 엄마는 내 일만큼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고집을 피우셨다. 그러다 보니 내가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합격 통지를 받기 전까지 부모님은 내 대학 문제로 집에서 말다툼하는 모습을 자주 보이셨다. 평소 부부싸움은 드라마 속에서나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엄마도 내 문제만큼은 관사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집안에서 큰소리를 내셨다.


정작 당사자였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지방에 있는 대학에 가든, 서울로 가든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전공하고 싶은 과목도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를 어떻게 설득했는지 결국 나 홀로 상경했다. 서울에 있는 자취방에서 거의 매일 부모님과 통화를 할 때마다 아빠는 대학 4년 졸업과 동시에 자취방을 빼겠다고 다소 험악한 말투로 말씀하셨다. 하지만 이제 막 서울에 올라온 나에게 4년이라는 시간은 까마득했기 때문에 '4년 뒤에 뭐라도 알아서 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았다.


서울에서의 첫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잠을 푹 자고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그런데 골목길에는 새벽 5시부터 출근하느라고 서두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았다. '서울 사람들은 이렇게 부지런하구나'라고 느끼며 창가에 서서 한참을 구경했다. 왜냐하면 내가 살았던 곳은 오전 7시에도 큰 도로에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서울로 이사 가기 일주일 전에 부모님이 계시던 집 바로 옆에 CGV가 드디어 생겼다. 하지만 서울에는 이미 구역별로 영화관이 있었다. 게다가 명동이나 종로 그리고 강남에 가면 20대 초반의 내 눈을 홀리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예쁜 옷들이 너무도 많았다. 조용필의 '서울 서울 서울' 노래가 괜히 히트를 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남의 한 지하상가에서 깨달았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부모님께 타서 쓰는 생활비로 살 수 있는 것은 한정돼 있었다. 맘에 쏙 드는 문구류라도 가격표를 먼저 보게 됐고, 매달 나오는 고지서를 엄마께 사진을 찍어서 보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왜냐하면 2.5평짜리 도시가스요금은 부모님이 계시던 아파트 24평 도시가스비+관리비보다 금액이 더 나왔기 때문이다. 주말마다 산 정상에 가서 시내를 내려다보면 경치를 즐기기보다는 수많은 아파트들과 회사 중에서 내가 들어갈 자리 한 곳이라도 있을까 싶은 불안함이 나를 내려 눌렀다. 가끔씩 삼촌 찬스로 5성급 호텔에서 묵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고층 창밖을 내려다보며 '과연 이 광활하고 경쟁이 심한 곳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 호텔 취업도 만만치 않던데 이 사람들은 어떤 스펙을 가지고 입사했을까?'라는 생각이 너무도 많아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명치가 답답해지는 일이 잦았고,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가는 일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때 친구들 몇몇이 큰 뜻을 품고 서울에 왔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추억 얘기를 하며 한 달에 한두 번씩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현실은 누구에게나 냉혹했다. 상경한 친구들 중 딱 한 사람만 빼고 전부 서울 생활을 버티지 못하고 몇 년 뒤 다시 본가로 내려갔다. 친구들은 다시 서울에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돌아온 친구들은 없었다.


누구에게나 서울에서의 삶은 끝이 안 보이고 아주 고된 과정일 수 있다. 여기서의 삶은 겉으로는 화려해 보이지만 그만큼 밝은 빛을 내기 위해서는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인내와 같은 수고로움이 많았다. 그런데 어떤 일은 내가 가장 완벽한 때에 가장 적절한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나는 인턴 면접까지 합치면 머릿속으로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면접을 봤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던 어느 날, 한 회의실의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 속으로 "아 C 나 이제 더 이상 못해!"라고 외치며 정장 앞 단추를 풀어헤치고 회사문을 나섰다. 그런데 밖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음 기회에'를 알리는 구구절절한 문자나 메일 대신 입사 날짜를 알리는 전화를 받았다.


2.5평 안의 원룸에서 침대와 마주 보던 작은 싱크대와 냉장고 사이에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해서 '과도' 하나를 올려놓고 잠을 자던 적도 있었다. 원룸 생활 4년 동안 단편 서스펜스 영화 몇 편을 찍었지만 이 초라했던 무대는 4년 간 내 이름으로 주거지 등록이 되어있었다. 덕분에 몇 년 뒤 원룸 바로 길 건너편에 위치한 아파트에 생각지도 못하게 입주하게 됐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매일매일이 고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소과장으로 진급이 되었을 때 노예처럼 일해서 모아둔 돈이 과연 얼마인지 계산해보고 싶었다. 하찮은 금액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총액은 아빠가 나를 서울에 보내기 직전에 모아둔 그의 전 재산과 비슷한 금액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서울에서의 내 삶이 너무나도 초라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빠는 본인의 얼마 되지도 않던 평생 모은 노후자금으로 나의 미래에 어마어마한 베팅을 했던 것이었다.


한 때는 미친 듯이 한국을 떠나고자 발버둥을 쳤지만 이제는 코로나로 서울조차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서울에서 더 재밌고 앞으로 더 잘 살아볼까만 고민하는 중이다. 출퇴근 왕복 4시간을 2년 동안 인내할 만큼 Y한테도 상경은 쉽지 않았을 거다. 본인이 원하는 대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둔 그의 공간에서 Y는 한껏 신이 나 있었다. 마치 내가 처음 서울에 왔을 때의 기분을 Y도 느끼는 듯하다. 요즘 집 주변에 핫하고 뜨는 카페가 많다고 새벽 3시 43분에 카톡을 보내는 Y가 서울에서 본인만의 하얀 도화지에 아름답고 희망찬 그림만을 가득 그릴 수 있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2021년 1월 마감 소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