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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쑤 Dec 03. 2019

기쁨이 없는 쾌감

충동의 역설

충동은 강력하다. 유기체를 움직이게 만드니까.

그렇다. 그래서 충동은 유기체가 생존하고 죽음을 넘어 계속 유전자를 남기도록 명한다.

그래서 충동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생존은 기본값, 모든 게 그 위에서만 의미가 있다.


더구나 신비로운 유기체는 충동이 충족될 때 강력한 쾌감을 느끼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럼 유전자의 설계대로 살면 매우 행복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렇지가 않다.


충동은 채워지는 순간에 체내에 강력한 화학물질이 분비되지만, 바로 이완된다. 충동이 채워지면 기분 좋음은 바로 사라진다. 그게 homeostasis의 기제이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평형 상태.

그렇게 몸이 우리를 채근하지 않으면 바로 생각이 장악한다.

생각은 이성이다. 통시적이며 감각이상을 원한다.

다시 말해 계획하고 통제한다. 내가 바라던 것을 이루었을 때 오는 기쁨은 충동의 쾌감보다 훨씬 짜릿하고 오래간다. 인간은 당최 이런 존재다.


예를 들면,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다이어터들은 충동이 명령하는 대로 치킨을 흡입하는 순간

강력한 쾌락을 느낀다.

 '아 이 맛이야~'

그런데 그 기쁨은 채 얼마 못 간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치킨 뼈만 남아있다는 얘기는 충동의 강력한 드라이브가 그만큼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얘기다. 평형 상태가 된 다이어터는 곧바로 자신이 다이어트에 실패했으며, 멋진 몸매는 물 건너갔으며, 자신은 스스로 정한 계획도 실천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자괴감에 빠진다.


그래서 최소한 치킨 앞에서 자신의 충동을 알아차리고 다음날 자신의 후회할 모습과 견주어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란다. 충동의 몰이질 앞에서 자신의 선택으로 치킨을 거부한 사람은 다음날 아침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날 때 그리고 비로소 지연된 충동을 채워주는 아침 식사를 베어 물 때 스스로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환호할 듯한 기쁨을 느낀다.

자신과 환경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때 느끼는 기쁨은 충동이 채워질 때 쾌감과 다르며 자기상과 연관되므로 그 힘은 막강하다.


따라서 도파민 샤워에만 반응하는 중독을 해결할 열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충동이 주는 쾌감과 내 이성이 누릴 기쁨을 두고 저울질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는 충동은 조절할 수 없으며 으레 패배했다는 오래된 도식을 깨고 새로운 자기상을 갖겠다는 희망이 있어야 한다.


수동성과 패배주의를 버리고 고달픈 자율성을 선택한 자는 쾌감 후 바닥이 없는 추락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아도 된다. 그는 이미 두 발로 땅-이것은 실은 단단한 자기감이다-을 딛고 서기로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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