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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Jun 05. 2023

고향에 간 이방인

거기가 불편하다면 지금 있는 그 곳이 좋다는 뜻이겠지요.

오뉴월이 되면 입가에 미소가 띠는 풍경이 있다. 일하면서 지나는 청도 각북면의 꼬부랑길과 시외버스에서 내려다본 합천군 삼가면의 길목이다. 오늘은 막내가 고향집인 합천에 와달라고 하였다. 엄마가 백내장 수술을 한 후 2시간마다 넣으라는 안약은 넣지도 않고 마늘밭에 나가려고 하니 말려달라는 것이었다. 막내는 엄마의 하나뿐인 눈마저 멀어버릴까 겁이 났던 모양이다. 나는 백내장 환자를 자주 접하기에 간단한 수술인걸 알고 있어 덤덤하였다. 주말에 남편과 하기로 한 데이트를 못한 게 아쉬워 투덜거리며 집으로 향했다. 스무 살 땐 집에 가는 날만 손꼽아 기다렸었는데 오늘은 가는 길이 영 반갑지 않았다. 내가 살던 마을에 가까워지자 산과 들과 길이 모두 초록으로 생기를 뽐내고 있었다.


마을 어귀에는 'LNG결사반대'라고 적힌 빨간 깃발이 해진 채로 나부끼는 게 보였다. 2년 전에 친척이 초대해 준 '합천 LNG반대' 카톡방을 조용히 나간 후 잊고 있었는데 해진 깃발을 보니 이제 반대가 필요 없어진 걸 알 수 있었다. 도시에 나가 있는 나에게는 여전히 관심 없는 일이었다. 집에 들어와 보니 엄마는 막내의 말을 잘 들었는지 알람이 울릴 때마다 안약도 잘 넣고 밭에도 나가지 않고 있었다. 새로 산 효도폰 사용법을 이리저리 알려주고 도시에서 사 온 반찬거리를 넣으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동고에는 기한을 모르는 음식물들이 비닐에 싸여 가득 차 있었다. 꽉 찬 냉장고를 보니 숨이 턱 막혀 바로 닫아 버렸다.


집 안에 있는 건 심심하고 외로웠다. 집엔 엄마도 있고 둘째 동생도 있는데 공허했다. 집을 나와 혼자 마을을 걸었다. 운이 좋으면 산딸기를 따 먹을지도 모르니 신나게 걸었다. 마을 곳곳엔 글쓰기의 주제인 <초록>이 한가득이었다. 영글고 있는 초록매실과 뱀딸기, 흐드러진 개망초와 달큼한 찔레꽃줄기를 사진 찍었다. 예쁜 순간을 찍으면서 엄마가 가두어 놓아 머리만 내밀고 있는 개집과 나를 낯설어하는 마을할머니와 흉가 같은 빈집을 지나쳤다. 외면하고 싶은 것들은 찍지 않았다. 밤이 되어 풀벌레 소리와 함께하는 맥주가 낭만적일까 하여 맥주를 들고 집을 나왔다. 마땅한 빈 건물 계단에 앉아 혼자 맥주를 마시니 낭만은 없고 스산하기만 하였다.


 다음날도 똑같았다. 나는 마음의 숙제를 다 해내고 집을 빠져나왔다. 한밤의 시골길 운전에 지쳐갈 때쯤 도시의 신호등 불빛들이 눈에 보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고향은 그대로인데 시간이 가며 무엇이 변해간 걸까? 한때는 고향에 와서 만나는 친구들이 재미였는데, 그마저도 결혼을 하고 뜸해진 탓일까? 내가 20년 동안 살았던 이 시골 마을은 매년 봄마다 푸르지만 시들어 가는 곳 같다. 불편한 무언가가 남아있는 고향에서 나는 이방인이 되어간다. 나는 다른 곳에서 내 세상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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