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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Sep 28. 2023

모순

동생에게 모순을 주다.

머리를 감으면서 종종 떠올리는 책이 있다. 양귀자의 <모순>이다. 주인공 '안진진이 왜 나영규를 선택했을까?' 나는 머리카락에 샴푸거품을 만들어 내면서 속으로 이 질문을 계속했다. 그리고 답했다. 어쩌면 솔직할 수 있어서일지도 모른다고.


작 중 안진진은 몽상가인 김장우와 현실적인 나영규를 두고 누구와 결혼할 것인지를 선택한다. 진진은 나영규 앞에서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가감 없이 말한다. '죽는 날까지 사랑이 지속된다면 죽는 날까지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절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 주지 못하며 살게 될 것이다.'라는 문장이 더 사랑한 김장우 대신 나영규를 택한 이유같이 느껴졌다.


샤워부스 안에서 안진진과 나영규를 떠올리는 건 내가 가족에 대해 솔직하지 못했던 이유가 궁금해서이다. 나는 10대 시절 독신주의자로 선언했지만 지금은 결혼을 했다. 어릴 땐 혼전임신이 아니면 결혼을 못할 거라 생각했다. 엄마대신 배우를 섭외해 결혼식을 해야 하나 고민했던 적도 있다. 이 스쳐가는 생각들이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배회하고 있던 중에 남자친구였던 남편과 엄마를 만나러 갔다.


때는 무더운 여름이었다. 아무 상의도 없이 결혼식 날짜와 예식장을 잡은 후 처음으로 남편에게 엄마를 소개하는 날이었다. 결혼식을 4개월 남겨두고도 나의 입은 꾹 닫혀있었다. 미루고 주춤거리다가 집에 도착하기 직전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엄마는 장애가 있어, 귀가 잘 안 들리고 눈도 한쪽 안 보여." 덤덤하게 고백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차 안은 고요해졌다. 눅눅한 집과 멀뚱한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차 안도 고요했다.


침묵으로 숨겨온 비밀이 인생을 요동치게 했다. 상견례를 앞두고 시어머니를 마주한 순간 나는 현실을 마주쳤다.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했다. 비장애인 자녀인 내가 오답인 사람 같았다. 이 모든 오답들은 엄마의 장애가 아니라 그대로의 나를 보일 용기가 없어서 생긴 거였다. 사랑은 나를 미화시키고 나를 왜곡시켜 왔다.


나는 잘못된 잠재의식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혼주석에는 엄마 대신 친척이 앉았다. 엄마가 혼주입장을 못 보게 10분 늦게 예식장에 들어오게 했고 가족과의 원판사진은 제일 마지막에 찍었다. 그 모든 순간에 엄마에게 미안하고 동생에게 부끄러웠고 어떤 동생에게는 냉정한 예언 같아 씁쓸해졌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느낀 슬픔 속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을 보았다. 평생 가져보지 못한 솔직한 세상은 숨통이 트였다.


그때의 친구들은 슬픈결혼은 하지마라며 나를 말렸었다. 그럼에도 결혼을 해내고  느낀 점은 "세상은 네가 해석하는 것처럼 옳거나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냐. 옳으면서도 나쁘고, 나쁘면서도 옳은 것이 더 많은 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야."라는 안진진의 대사와 같다. 결혼식까지 나를 슬프게 했던 시어머니가 이해되고, 나의 괴로움을 같이 느끼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남편이 고맙다.


침묵하고 있는 동생에게 전하고 싶다. "누추한 나의 모습이 부끄러운 존재로 보일 때도 있어.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자존심이래. 나는 누추한 나를 다 보일 수 있는 남편과 살고 있어.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도 꽤 멋이 있어. 자존심에 너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 우리는 오답이 아니야. 용기를 내면 좀 나아질지도 몰라" 동생이 나의 인생에서  씁쓸한 예고가 아니라 멋있는 희망을 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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