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e Park Apr 10. 2021

At high noon

의기소침할 땐 서부영화를 보는 걸 좋아한다. 먼지가 날리고 지난 세기에 한 번 빨았을까 싶은 누런 내복 차림에 한쪽 클립이 풀린 멜빵바지. 아니면 원래 색깔을 알아볼 수 없는 셔츠에 구멍 난 바지를 입고 불 위에선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콩 스튜가 끓을 동안 긴 총신을 닦는 거지. 꽁초가 된 시가도 잊으면 안 돼. 

어쩌면 정오가 되면 누군가와 결투 약속이 있을 거야. 도망치고 싶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아. 그리고 생각해 보는 거지. 나한테 키스를 날리던 그는 지금쯤 기차를 무사히 탔을까. 함께 가자며 울먹이던 눈동자가 떠오를 것도 같지만 이젠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열차 식당칸의 하얀 테이블보 따윈 나와 어울리지 않아. "안녕하세요, 부인, 아니에요, 부인, 그럴 리가요 부인" 따위를 주워섬기며 살고 싶진 않아.

그래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바람이 마른풀 덩이 들을 굴리며 노는 동안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눈먼 늙은 술집 주인에게 하모니카를 불어달라고 하는 거야. 아껴 마시던 싸구려 위스키도 동이 났고 이제 슬슬 해가 하늘 가운데로 향하는구나. 

그에게서 엽서가 오면 더 서쪽으로 갔다고 해줘. 멋진 나바호 남자를 만나서 그를 따라 보호구역으로 가버려서 엽서를 전해줄 수 없었다고. 

 At high noon.
 


이전 02화 어른의 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