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굣길이 늦어져서, 아니 너무 늦지는 않은, 초저녁의 오르막길 골목을 오를 때가 우울하다. 그리 어두운 하늘도 아닌데, 저편으로 넘어가는 해가 너무 빨라서 더욱 어둡게 느껴지는 배경이 아주 아늑하게 우울하다. 언덕 위에서 내려보는 마을이 작은 점들의 빛들로 바뀌어갈 때, 이 우울감이 포근하면서도 썩 유쾌하진 않아서 도망칠 것이다. 이런 시에 딱 좋은 도망을 치자. 선우정아의 가사처럼 아늑하고 묵직한 도망이 아니다. 필사적인 도망이 필요하다. 무엇을 잃는지도 모른 채 상실을 두려워하며 회피하는 모습은 못난 도망이다.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며 악을 쓰고 눈을 감아버릴 것이다. 시끄럽게 소리 지르면서 날카롭게 도망칠 것이다. 지독한 도망이 못난 도망보다는 진하지 않나. 진한 게 흐린 것보다야 낫지. 선택하지 않겠다는 선택을 제대로 해볼 심산이다. 완전한 회피로 안주라는 편안함에 푹 잠겨버릴 것이다. 조급한 마음의 반대편이 초연하고 시니컬한 태도라면, 차라리 실수를 범하고 말리라. 현명한 선택을 하지 못할 두려움에 눈과 귀를 막고 그저 도망쳐버릴 테지. 그렇게 정신없이 도착한 이곳은 회피라는 도피처. 차라리 선택당하기를 기다리라는 시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는 현명한 사람일지 비겁한 사람일지 혼란스러웠다. 모르긴 몰라도 당신은 기만적이에요. 도망친 주제에 숨이 차도록 헐떡대지도 않으려 하다니, 차라리 전력질주를 할 테지. 도망가자, 아니 도망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