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언젠가 여행을 가는 길에 비행기에서 읽으며 소설 속의 낭만을 실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낭만은 스무 페이지를 넘기기가 어려웠다. 이토록 하찮은 메시지며 문체며, 낭만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욱여넣고 누리고 싶었지만, 절반을 넘기기 전에 관두었다. 어쩌면 대중은 이렇게나 가벼운 이야기만을 원했던 건가? 이토록 실망스러운 대중을 나는 어떻게 믿고 고전을 고전이라 여기지? 현재의 대중이 미래의 고전을 만드는 게 아닌가? 수많은 의문점, 아니 사실 불만이었을 것이다. 그러했던 알랭 드 보통을 맞이한 수년 전 모습을 떠올리며 스스로도 우습다고 느끼면서 다를게 어딨을까 싶은 제목의 영화를 보러 수많은 인파로 북적이는 지하철로 몸을 실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웃음이었을지도 모르는 모순적인 생각에 오히려 묘한 신명을 느끼며 평소에 그토록 싫어하던 혼자 관람하는 시간을 스스로에게 선물했다.
영화는 아름다웠다. 매우 하찮고 고결함과 가장 거리가 멀지 않을까 싶은 그런 사랑이야기였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모두 이 참을 수 없는 가벼운 감정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지점을 너무도 잘 묘사한 영화였다. 누구도 명명하지 않았지만 바람이라는 표현 그 자체의 행동으로 상대를 지겨운 따분한 사람으로 취급해 버리는 주인공은, 놀라울 만큼 사랑스럽게 표현되었다.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다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따분함을 느끼며 낯선 이에게 황홀한 끌림을 느끼는 장면에서도, 곱슬곱슬한 긴 머리는 사랑스러움의 대명사라도 되는 걸까,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이 이렇게나 이기적인 것을 이기적이기에 솔직하게 표현할 거야 까지도. 이러해도 괜찮아는 아닐 것이다. 이러한데 어찌하리 정도였을까, 영화가 끝나갈 무렵 생각나는 건 오직 가장 사랑했던 첫사랑뿐이었다. 끝난 인연에 기어이 문자를 보내는 최악의 모습을 나는, 사랑할 때 최악이 되는 또 하나의 인간일 뿐이라고, 영화표를 찍어서 전송하며 우스운 본인의 행동에 묵직한 만족감을 느끼며 상영관을 나선다. 이제 생각나는 이야기라고는 나는 고상한 예술만 향유할 것이라는 오만함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영화에 걸맞은 우스운 행동을 했다는 만족감, 이 또한 웃기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