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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13. 2020

prologue : 여름이 오고 있다



"주문하신 커피 두 잔 나왔습니다."



늘 마시던 거였다.

난 드립 커피 그대로.

넌 설탕 한 스푼, 크림 한 스푼.


각자 주문한 커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카페 안이 소란스러워서 밖으로 나왔을 뿐, 딱히 가고자 하는 목적지는 없었다.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외곽, 넓은 주차장을 사이에 둔 카페와 로컬 마트. 우리가 늘 버릇처럼 들리던 곳. 서로 아무 말 없이 넓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느릿느릿 걷기 시작했다.





"집 앞으로 갈게, 잠깐 나올 수 있어?"


기다렸다.

내심 네가 먼저 연락 주기를.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찾아와 주기를.



언젠가, 내가 너의 손을 놓게 되더라도 너는 끝까지 놓지 말아 달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내가 어려서, 가장 친했던 너에게 나의 감정들을 솔직히 풀어내지 못하고 무작정 그렇게 부탁한 적이 있었다. 내가 못나서,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한 좌절감이 너에 대한 원망으로 바뀔까 봐 솔직히 털어놓지 못하고 그저 간절히 바라기만 한 적이 있었다.

 

너는 옅게 웃으며 그럴 일 없다고 잡고 있던 내 손을 번쩍 들어 올려 보였다.



"이건 절대 못 놔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너를 밀어냈다.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그 얼굴을 내게 보여줬을 때, 가장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을 내 손으로 만들어냈을 때, 내 마음 또한 같이 무너지고 쓰러졌다.


나 혼자서 풀고 해결해야 할 개인적인 문제라고 자기변명을 하며 하나 둘, 내 주변으로 쌓아 올린 벽은 어느샌가 네가 허물기엔 너무 두꺼워져 버렸고 나와 가장 가까웠다 자부했던 너는 그 벽안으로 한 발자국도 들어오지 못한 채, 그렇게 돌아서버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너를 밀어내고 문도 창문도 없는 벽 뒤에 숨어 혼자 고립되어 버리는 선택을 했었다. 너에게 한마디 변명도 없이.



그리고 너는 한 달 뒤, 이렇게 나타났다.







"잠깐 앉을까?"



너의 목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동네 사람들이 카트에 한아름 장을 보고 나오거나 동네 꼬마들이 자전거와 스케이트 보드를 주차장 한편에서 빙글빙글 돌며 타고 있었다. 그들의 실루엣이 반짝거려 보인 다는 건 지금, 서서히 하늘이 화려하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단 것.


오늘따라 유난히 손이 데일 듯 뜨거운 커피를 들고 주차장 턱에 걸터앉았다. 평일이라 그런지 차도 별로 없고 해가 지는 걸 바라보기에 딱 좋은 뷰. 한참 말없이 커피만 홀짝이던 네가 슬며시 내 손을 잡는다. 지난 시간 동안 한없이 다정하게 나만 바라봤던 그 눈을 다시 마주하니 울컥, 그동안 혼자 삭혔던 말들이 밀물처럼 몰려온다.



내가 그동안 처음 겪어보는 상황들에 스트레스를 너무 받았나 봐. 

너한테 진작 얘기하고 털어놨어야 했는데 내가 겁쟁이라 그러질 못했어.

내 진심 아닌 거 알잖아, 

내 마음 알고 있잖아.


내가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아무리 그랬어도 그렇게 널 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이 뭐가 그렇게 망설여졌는지. 바싹바싹 타오르는 입술만 움찔움찔, 결국 한마디도 못하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너는 쓸쓸히 웃으면서 얘기한다.




"다시 만날 거야.


우리가 정말 인연이라면."





아 -

그 말을 뱉는 너에게 나는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존재.

이 말을 전하기 위해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너는 그렇게 달려왔구나.


내가 너무 늦어버렸구나.





물어보고 싶어.


그때,

그 말이 진심이었는지.

두 손을 맞잡고 말해주던 너는

정말 그렇게 될 거라 바랐는지.



그때 못했던 나의 말들과 함께 삼켜진 너의 그 말이 오랜 시간, 나는 너의 인연이라 믿으며 지내온 시간들이 아직도 소화되지 않아서 그래. 그 인연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 걸 알면서도 바보같이 이래.



"이제 정말 여름이 오려나 봐."



나를 너무 잘 아는 너는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나를 잠시 기다리다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나는 여전히 너에게서 고개를 돌리지 못한 채,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너의 옆모습을 꽤나 신중하게 하나하나 곱씹는다. 머리카락으로 살짝 가려진 너의 이마, 웃을 때마다 만들어지던 눈 옆 두 줄의 주름, 높은 콧선, 꾹 다문 얇은 입술, 수염이 까칠하게 나 있던 너의 턱선, 내가 좋아하던 너의 옅은 머리 색깔 까지도. 오늘이 지나면 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삶에서 문을 열고 나가버릴 것 같아서, 이렇게라도 기억 속에 새겨놓고 싶어서, 꾹꾹, 찬찬히 눈으로 너를 담는다. 황금색으로 번져가던 너의 옆선이, 정말로 빛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고 말았다.



후회해. 

너를 보낸 그 순간부터 후회해.




어디선가 더운 바람이 훅 불어온다. 내 긴 머리카락이 시야를 가리고, 입 속에서만 머물던 말들도 바람사이에 섞여 너에게 닿은 듯, 너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후끈하고 무거워지는 공기의 무게.

코 위로 송골송골 맺히는 땀방울.

한없이 가라앉는 시린 마음.

끝까지 전하지 못한 말.




여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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