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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15. 2020

독일 빵집




"여기 내 단골집."



술을 안 마시는 우리는 맛집보다 카페를 더 자주 가곤 했다. 아침에 만나면 잠 깨자고 커피 한잔씩 손에 들고 점심때 만나면 점심 소화시키자고 커피 한잔씩 손에 들 던 우리였다. 그러던 네가 데려간 곳은 네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외딴 골목 안쪽에 서있던 낮은 건물 앞이었다.


"여기 빵집 아니야?"


딱 봐도 빵공장 같던 그곳은 각종 빵이 매일 같이 즉석에서 만들어지는 곳이었고 사람들이 들락날락거리며 빵이 담긴 종이봉투를 한가득 품에 안고 나오기도 했다.


"빵집 맞아. 독일 사람들이 운영하는. 근데 내 주변 사람들 아무도 몰라. 이 곳에서 커피도 파는지."



문을 열고 들어간 그곳은 따뜻했다. 

회색빛의 추운 바깥 날씨와는 대조적으로 밝았고 환했으며, 갓 구운 모락모락 김을 내는 빵들이 고소한 냄새와 함께 진열되어 있었다. 하얀 뉴스보이 스타일의 모자와 물결 모양으로 멋을 낸 짧은 앞치마를 두른 종업원들은 줄 서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온 빵을 계산하고 담아주느라 분주했다. 옛날 독일 어딘가의 동네 빵집에 온 것처럼 인테리어는 아기자기했고, 벽에 걸려있는 흑백 사진들이 이곳의 역사를 알려주기도 했다. 대부분의 손님들은 연세가 있어 보이는 동네 어르신 분들이었고 두툼한 외투 사이로 발그래진 두 볼에 미소가 만연한 채 빵을 고르는 손이 바쁘게만 보였다.


우리도 파이 두 개, 데니쉬 한 개. 

심심한 입을 달랠 정도로만 고르고 카운터 앞에 줄을 섰다. 너는 익숙한 듯 커피 두 잔을 시켰고, 카운터 뒤쪽으로 걸어가며 나를 향해 손짓했다. 테이블 4개 남짓, 앉아서 먹고 갈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이미 빵과 커피로 느지막이 아침을 시작하는 노부부, 읽다만 신문을 곁에 두고 슬슬 일어날 채비를 하는 할아버지, 엄마를 모시고 온듯한 인상 좋게 생긴 아줌마까지. 우리는 남아있던 동그란 테이블에 앉은 채 막 구워낸 파이를 한입 베어 물고,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부드럽고 깊은 맛의 커피.

나는 꽤나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너를 바라봤고 너는 데니쉬를 잘라 내 앞으로 밀어줬다.



"잠깐, 사진 좀 찍고."



커피를 먼저 마시고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온 나는 너를 잠깐 불러 세웠다. 내부에서는 사진 촬영 금지였기에 남은 빵을 담아 가지고 나온 종이봉투를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 들려있던 핸드폰으로 봉투를 찍었다.



"봉투는 왜?"



"로고가 올드하면서 멋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여기 빵집 이름 외우기 어려워서 이렇게 찍어놓고 까먹으면 보게."




너는 어차피 자기랑 자주 올 텐데 뭘 어렵게 외워, 라며 어깨를 감싸 안았다. 정말로 우리는 그곳에 자주 왔다.







내가 그 봉투의 로고 사진을 다시 마주하게 된 건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너무 맛있는 커피, 우리의 최애 장소."



인스타그램. 

한때 친했던 그녀의 피드였다. 순간 놀라서 멈칫했지. 여기, 정말 아무도 모르던 곳이었는데.


그녀의 손이 찍힌 배경을 자세히 보니 익숙해. 너의 차 안이구나. 잠시 망설이다 그녀의 계정으로 들어가 봤다. 이제는 나를 언팔 중인 계정sns 귀찮아서 잘하지도 않고 들어가도 슥슥 손으로 넘겨서 대충 보는 게 다였는데 여기, 그녀의 계정에서 수도 없이 말하고 있었구나. 너의 차 안, 너와 함께 갔던 레스토랑, 너의 집에 있던 테이블, 너의 손글씨.


그녀는 그렇게 나에게 여러 방면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나만 몰랐었구나. 그녀는 나와 헤어진 그 순간에도 너와 함께 있었다고, 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나의 기억을 본인이 덮겠노라고 그렇게 증명하고 티를 내고 있었는데.


우리만의 장소, 라는 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었구나.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사실, 과거의 내 기억에 기반한 현재의 바람이 이루어낸 허상 같은 게 아닐까. 어쩌면 나는, 미래의 그녀에게 가기 위한 너의 발판에 지나지 않은걸 지도 몰라.


이렇게 생각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너 또한 나에겐 하나의 발판에 지나지 않을 뿐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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