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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20. 2020

맨발





"늦겠다."




건조했다.

너의 말투 속엔 별다른 감정이 없었고 집 밖 공기는 차가웠다.



"잠깐만, 문 좀 잠그고."




간밤에 잔뜩 내린 눈 덕분에 주변은 눈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길거리는 덜 녹은 눈이 아스팔드 곳곳에 드문드문 뭉쳐 있었다. 햇빛은 하얀 눈에 반사돼 따갑도록 눈부셨고 차가운 공기는 절로 목을 움츠러들게 했다.


너는 앞서 걸었다. 여전히 맨발.

추운 겨울에도 우리는 양말을 잘 신지 않았다. 나는 발에 땀이 안 난다는 이유였고 너는 갑갑하다는 이유였다. 너의 발이 옮겨지는 자리를 따라 밟으며 너의 뒤를 쫓아 걸었다.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늘, 이게 우리가 마지막으로 나란히 걷는 걸음이라는 걸 말로 내뱉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길게 공유한 지난밤. 그동안 느끼고 있었던 서로의 대한 감정들, 서로를 정의하는 단어.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주제였지만 한 번은 마주해야 했기에, 조심스러웠지만 솔직했다. 긴 대화 끝에 우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한다고 생각하고 잠들었는데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다. 너는 나를 인정했지만 이해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답으로 너는 침묵을 택했고, 나는 그 침묵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척, 같은 침묵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매번 나란히 걸어가던 그 짧은 길을, 앞뒤로 떨어져 걸으며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시간 위를 아무 말도 없이 걷기만 했다.



네가 멈춰 섰다.

사거리 앞 횡단보도.



"넌 그쪽으로 가지? 난 이쪽."



사거리 횡단보도를 두고 우리는 각자의 길로 향했다. 길을 건너야 했던 너는 횡단보도 앞쪽으로 나와 섰고, 나는 건너지 않은 채 오던 방향대로 계속 걸어가면 되었다. 너는 저쪽, 나는 이쪽. 이따 봐, 끝나고 연락할게, 같은 인사는 없었다. 약속이나 한 듯이.



"그래, 갈게."




너는 끝내 말이 없었다. 돌아서는 나는 이미 입술을 잔뜩 깨물고 있었다. 내가 연애에 서툴러서 그런 건가, 내가 모르는 말실수가 있는 건가, 내가 이해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는 건가, 반쯤 알 수도 있을 것 같은 이유를, 나머지 반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아가면 돌이킬 수 없는 눈이 쌓인 이 길도,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비치는 뜨거운 겨울의 태양도, 다시 볼 일 없을 풍경이라는 생각에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밀려 나오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네가 눈치챌까 들썩이는 어깨를 가까스로 붙잡은 채 좀 더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한동안 너와 마주칠 일이 없었다. 오히려 잘됬어. 마주치면 어쩔 건데, 피해? 도망가? 아무렇지 않은 척해?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돌아 나오는 카페 앞에서 너를 마주쳤다. 다정하게 기대어 있는 그녀와 함께.



"안녕, "



네가 자연스럽게 인사를 했다.

마주치면 어쩌지 했던 내 생각들이 무색하게, 너는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인사를 건넸다. 그 짧은 순간 얼마나 많은 대응 상황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는지, 결국 나는 너와 같은 톤의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



생각보다 더 건조한 내 목소리에 너는 짐짓 놀라는 듯했지만, 나는 오히려 홀가분 한 기분이었다. 피식, 웃음까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난데없이 입꼬리를 올리는 내가 의아했던지, 무언가 뒷말을 기대하는 듯 커진 너의 눈동자를 뒤로하고 걸어 나왔다. 사실, 얼굴을 마주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나는 너에게 일말의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구나. 그렇게 눈물을 쏟아내던 내가 생각나서 또다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안녕, 

이 말도 아까운 사람.


b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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