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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21. 2020

자고 있는 내 모습



가끔 밤늦게 너에게 가곤 했다.

다음날 아침 일이 없을 때나, 밤늦게까지 작업을 하고 나서 집에 가는 것조차 귀찮아질 때면 지친 얼굴로 너에게 가곤 했다. 집 과는 정 반대 방향이기는 했지만 작업실과 더 가깝다는 이유로 갈림길 앞에선 망설임 없이 자연스럽게 너의 집 방향으로 발길을 틀었다.



"오늘 밤만 신세 질게."



회색 문 틈 사이로 비스듬히 서서 나를 맞이한 너는 기다렸다는 듯 씩 웃으며 몸을 한쪽으로 틀고 반쯤 열려 있었던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와."



너는 들을 만한 곡들을 조심스레 선곡해서 틀어놓기 시작하고 나는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을 흥얼거리며 바닥에 흩어져있는 너의 스케치들을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연필로 남겨놓은 메모들과 스케치들을 훑어보며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우리는 곧 팩으로 된 와인을 하나씩 따고 침대에 기대 바닥에 앉은 채 각자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미안, 내일 아침에 너 나가야 하는데 나 때문에 일찍 자지도 못하고."



"원래 일찍 안자는 거 알잖아. 그리고 난 잠도 잘 못 자. 꿈을 많이 꿔서."



좋겠다.

꿈을 많이 꿀 수 있는 네가 부러웠다. 자고 일어나면 생생한 꿈들 덕분에 너는 꿈을 해석하고 그걸 작품으로 표현할 수 있는 센스가 있었다. 나는 잠은 많고 꿈은 꾸지 않는 사람이어서 무의식의 소재들을 의식의 표현으로 사용할 수 있는 네가 부러웠다. 너는 꿈들 때문에 오래, 깊게 잠들지 못하고 피곤하다며 툴툴 댔지만 그것마저도 나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너는 머릿속의 이미지들을 그려내고 있었고 나는 내 눈앞의 물건들을 그려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땐 이미 커튼 사이로 햇빛이 한 움큼 들어와 있을 무렵이었다. 바닥에 앉아서 졸았던 것 같기도 한데 눈 떠 보니 입었던 옷 그대로 침대 이불속. 렌즈도 안 빼서 눈이 뻑뻑했다. 눈 앞의 핸드폰을 집어 드니 9시. 너는 이미 떠나고 없을 시간이었다. 나도 마냥 누워 있을 수는 없어서 눈을 한번 감았다가 큰 호흡을 내 쉬면서 일어났다. 높게 올려 둥글게 말아 묶었던 머리가 헝클어져 한쪽으로 기울어 왼쪽 이마를 가렸다. 이불을 걷어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데 누웠던 머리 언저리에 놓여 있는 열쇠, 그리고 그림 한 장.



"풉, 딱 봐도 나네."



입을 살짝 벌리고 세상모르게 자고 있던 나를 그 바쁜 아침 시간에 후딱 그려놓고는 열쇠와 함께 두고 나갔다. 굵은 연필선으로 간결하게 그려놓은 나는 너의 이불을 덮고 꿈을 꾸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림 밑으로 남겨놓은 너의 몇 마디 말들에 지금이 꿈이라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겠다 싶었다.




열쇠는 이따 만나면 줘.


ps. 일어나면 연락해.

ps II. 코를 고는 거 같던데..

ps III. 고백할 게 있는데, 나가기 전에 입술을 훔쳤어. 한 번은 아니고, 몇 번. 이따 만나면 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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