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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Oct 24. 2020

도장




"그림에 왜 표시가 없어?"



"무슨 표시?"



"내 그림이라는 표식 같은 거 있잖아. 싸인일 수도 있고, 그림 속에 숨겨놓은 이름일 수도 있고."



내가 그리는 그림들은 오리지널리티를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는 그림들이라는 걸 알면서도 너는 장난스럽게 물어봤다. 



"웃기잖아, 뭘 대단한 걸 그린다고 표시까지 해." 



킥킥대며 커피를 사러 가던 우리는 내가 만약 유명해져서 내 그림이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좋은 종이에 프린트되어 팔리게 되면 싸인 정도는 고려해 보겠노라 장난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진짜, 진짜, 아무것도 사지 마. 그냥 맛있는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생일을 얼마 앞두고 내가 너에게 한 말이었다. 나에게 생일은 그렇게 중요한 날이 아니었고, 이미 너로 나는 충분했기에 진심으로 네가 나에게 뭘 사줘야 할지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알았어. 안 샀어. 그나저나 뭐 먹고 싶은 지나 생각해놔."



그렇게 내 생일이 돌아왔고 각자 작업에 바빴던 우리는 근처에 있던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이나 먹자고 얘기를 했다. 해가 떨어지며 노을을 만들어내던 즈음, 너는 나갈 채비를 하고 있던 나를 데리러 왔다. 그리고 한참을 쭈뼛거리더니 생일 축하한다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시간이 없어서 포장지를 못 샀다며  종이로 엉성히 포장한, 네모나고 작은 상자 하나였다.


두껍고 뭉툭하지만 매끄러운 나무 조각. 사각형의 나무 조각 바닥에 본드로 붙어 있는 얇은 고무. 뒤집어서 고무바닥을 보니 그 위에 새겨진 내 이름. 판화는커녕, 조각칼 한 번 만져 본 적 없는 네가 삐뚤빼뚤 파내려 간 내 이름 두 글자. 동양화에서 본 듯한 낙관 모양을 따라 만든 도장처럼 이름 주변으로 테두리도 둘렀다. 그림에 따라 다르게 찍으라고 까만색과 빨간 잉크도 준비해서 건네는 그 모습이, 사실 획이 많아서 중간에 포기할까 생각도 했다는 그 말이, 막상 다 만들었는데 안 예뻐서 줄까 말까 고민했다며 눈썹을 살짝 아래로 내리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목을 꽉 끌어안았다.



"아냐, 최고야. 최고의 생일 선물."



도장 치고는 큰 사이즈에 글자 간격도 엉망이었지만 딱 너여서, 나 몰래 틈틈이 조각했을 너의 시간들이 고무판 위에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한참을 바라보다, 내 그림 리미티드 에디션을 만들게 되는 날이 오면 꼭 이걸로 찍겠다고 하고는 네가 준비한 빨간 잉크를 도장에 잔뜩 묻혔다. 그리고는 너의 손등에 벌겋고 진하게 꾹 눌러버렸다.



"자, 내 리미티드 에디션 넘버원, 넘버원 앤 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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